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에서도 양주 사람들은 불꽃같은 생명력을 잇고자 치열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산과 길, 들판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목숨 걸고 싸웠고, 수백 명이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거울과 같다. 세월이 지나도 경기북부 종갓집이 양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발달한 경기북부 중심도시 양주는 항일민족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일제가 강제로 우리 군대를 해산한 뒤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연합해 일제가 장악한 서울을 공격하는 핵심 거점으로 활용한 경기북부 의병활동 중심이었다.

3·1운동 당시 양주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역을 크게 축소한 상황이었지만, 16개 면 관할 구역 가운데 14개 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 경기도 지역에서 광주와 더불어 만세시위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다.

기호일보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경기북부 중심인 양주의 빛나는 항일운동정신을 다시 조명하고자 일제의 강점 책동에 맞선 항일민족운동 발자취를 살펴봤다.

양주지역 의병장 정용대 묘소 에서 진행한 진혼제(1978).
양주지역 의병장 정용대 묘소 에서 진행한 진혼제(1978).

# 강제 군대 해산에 맞서 일어나다

청일·러일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권을 강화하던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을 앞세운 통감을 중심으로 외교권 강점, 대한제국 황제 양위 같은 강점 획책을 대놓고 드러냈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군제 개편이라는 미명으로 줄곧 대한제국군을 감축했고, 1907년 7월 24일 소위 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비공개 각서를 추가하면서 대한제국 자위권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강제로 해산했다.

각서는 한국에 한일 양국인에 따른 재판소와 감옥 설치, 한국의 군비 정리, 협약에 근거해 일본인 관리를 중앙과 지방에 둔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남은 병력을 일본 군대에 복속시키려는 계략이었다. 결국 한국군 정비는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한국군을 해산하고 일본군으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일제는 시위무관부와 동궁무관부, 친왕부무관, 군부, 무관학교, 근위보병대 4개 중대 745명만 남겼다. 그나마 실제 전투 병력은 5개 중대 규모이고, 그 말고는 왕궁 호위병과 교육기관만 명맥을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로 불복하면서 제1연대 1대대 병사들이 무장 봉기하고, 이어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봉기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원주진위대와 수원진위대 강화분견소가 해산을 전후해 봉기했다.

이후 봉기군들은 민긍호와 김덕제 부대로 분진해 크게 활약하며 당초 의병진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서 구국의병 항쟁의 새로운 전환기가 됐다.

해산 당시 즉시 봉기하지 못한 해산병 중 다수가 당초 의병진에 들어가거나 개별로 의병부대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로써 의병 전술과 전략의 변화는 물론 무기를 비롯한 화력이 증가하고, 의병부대 전투력을 한층 강화하는 기회가 됐다.

정용대(왼쪽)·윤인순 의병장 묘소 전경.
정용대(왼쪽)·윤인순 의병장 묘소 전경.

# 군대 해산한 뒤 임진강 중심 의병투쟁

군대 해산 과정에서 봉기한 군인들의 의병 참여가 많아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경기북부지역은 임진강을 중심으로 강력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허위·이은찬·김수민·박종한이 대표 격이다.

당시 경기도에서 해산병 참여로 한층 강화한 의병부대는 허위 의병부대와 이은찬 의병부대였다. 전기 의병에서도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는 의병을 해산한 뒤 귀향했다가 관직을 제수받았다.

일제가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그의 침략성을 비판하는 통문을 돌리는가 하면, 정우회를 조직해 일진회 매국성을 성토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고 일제 만행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하기도 했다.

정계에서 물러나 일제 침략상을 주시하던 허위는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한 뒤 1907년 9월 김진묵·왕회종 추대를 받아 연천·적성, 그 밖의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허위는 이 지역 말고도 양주·파주·개성·삭녕·안협·토산·이천에서 다수 의병을 모집해 활동했다.

양주지역에서는 이은찬 의병부대가 봉기해 경기도뿐 아니라 황해도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강인하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또 다른 의병부대로 권준 의병부대와 박래병·김석하 의병부대가 봉기해 양평과 영평에서 활동했다.

양주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 조인환은 1907년 7월부터 양주와 파주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양평 군아·세무서·우편취급소를 습격했다. 임진강을 근거지로 경원·경의도 부근에서 그 기세를 떨쳤다.

백석면 연곡리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사범 수형기록카드.
백석면 연곡리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사범 수형기록카드.

# 전국 13개 도 연합의병 태동과 서울진공작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봉기군이나 해산군 의병부대와 당초 의병부대는 각기 의병투쟁은 물론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거나 상응해 활동하기도 했다.

허위 위병부대가 민긍호·이강년과 상응해 명성을 떨쳤다고 하고, 중부지방 의병부대는 단독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했고, 이를 바탕으로 경기지방 중심 연합의병진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울로 진입해 탈환하고 일제를 몰아내자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이인영 의병부대와 허위 의병부대 사이에 협의를 거쳐 13도 의병통합군인 13도 창의대진소를 설치하고 서울로 진공하기로 합의했다. 이인영은 1907년 11월 전국 의병장들에게 경기도에 집합해 연합의병부대로 나아가기로 하고 원주를 중심으로 인근 의병부대를 통합하고 자신이 관동창의대장이 됐다. 이에 따라 전국 의병장과 의병부대가 양주에 모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8개 의병부대에 약 1만 명이 집결했는데 민긍호 의병부대 2천 명, 이인영 의병부대 1천 명, 허위 의병부대 2천 명, 이강년 의병부대 500명, 권중희 의병부대 500명, 방인관 의병부대 80여 명, 정봉준 의병부대 80명, 문태수 의병부대 100명이었다.

이 중 군대 해산으로 봉기하거나 해산한 군인 출신자는 이은찬과 이구채가 인솔한 80여 명, 강원도 민긍호 휘하 500명이었다. 서울과 강화·청주 출신 병사들도 양주에 집합했는데 그 숫자가 3천여 명이었다.

13도 창의총대장에 이인영, 전라창의대장(전라도) 문태수, 호서창의대장(충청도) 이강년, 교남창의대장(경상도) 신돌석, 진동창의대장(경기도·황해도) 허위, 관동창의대장(강원도) 민긍호, 관서창의대장(평안도) 방인관, 관북창의대장(함경도) 정봉준으로 구성했다.

부곡리 만세시위 현장.
부곡리 만세시위 현장.

# 실패로 끝난 서울진공작전 뒤 독자 활동

13도 연합의병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하고 13도 창의대진소를 해체하자 의병장들은 각기 독자 활동을 전개했다. 더구나 선봉장이었던 허위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이은찬·김수민·박종한 부대와 호응하며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기도 지역과 일부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연합의병에 의한 작전 실패는 의병운동 성격을 위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이 친일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를 미국에서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이 국내에 널리 퍼지면서 항일운동 기운이 전국으로 확산했다. 의병운동 방략에서도 더욱 적극 전투를 치르고 세력을 확대했다.

의병운동이 격화하자 일제는 주한일본군과 일본헌병대·경찰로 대표하는 토벌기관을 증강하고, 이 과정에서 헌병보조원을 뽑아 한국인을 일제 주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대규모 의병부대 전투는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전투를 거듭할수록 저명한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붙잡혀 세력이 약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은찬 의병부대는 양주를 근거지로 양주·포천 일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무기 획득은 물론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줬다.

이 밖에 양주·파주·포천에서 윤인순·정용대·강기동·연기우 의병부대가 활동을 이어갔다. 양주 출신으로 윤인순 의병장이 활동했다. 윤인순은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일제가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양주에서 의거했다. 파주·적성·포천에서 활약하던 윤인순은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허위 의병부대에 합류해 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1908년 3월께 의병부대를 다시 조직해 참모장 홍원유, 선봉장 김종운, 부장 노재훈을 비롯해 40명 규모로 양주를 근거지로 일본군 공격, 일진회원 처단, 회유·납세 거부, 친일 지주 소작료 거부 같은 내용을 담은 격문을 발송했다.

양주시는 가래비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줄곧 연다.
양주시는 가래비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줄곧 연다.

# 3·1 운동 당시 활발한 만세시위 벌인 양주

일제강점기 당시 양주군은 서울과 가까운 도시 중 다른 어떤 지역보다 행정구역 변천이 심했던 곳이다. 3·1운동 당시 양주지역은 의정부와 동두천, 남양주, 구리, 서울로 행정구역을 대부분 이관하면서 크게 축소됐다.

3·1운동 당시 양주지역은 16개 면 관할 구역 가운데 14개 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미금·와부·화도·진접·이담·노해·백석·구리·광적·장흥·별내·진건·시둔·주내면이다.

당시 경기도에서 광주와 함께 활발히 만세운동을 펼친 곳이 양주지역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주지역 3·1운동과 관련한 판결문이나 신문조서 같은 자료는 거의 없다. 백석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안종규를 비롯한 다섯 사람에 관한 간단한 판결문이 유일한 자료일 정도로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해 그 실체를 추적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양주문화원이 3·1운동 당시 사실을 어린 시절 들었던 장흥면 채광석 선생의 증언을 채록해 양주 항일민족운동사로 남겼다.

# 양주지역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양주에서 태어나거나 산 항일민족운동가나 양주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많지만 관련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양주문화원이 기록한 항일민족운동사가 있어 위안이 된다.

의병장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로, 많은 문인들이 추앙했다고 한다. 1895년 단발령을 내리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의암 유인석, 운강 이강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로 출진해 관동창의대장에 올라 의병을 모집해 군세를 키웠고, 1907년 11월 각도 의병부대를 양주로 집결하도록 해 전국 의병들을 규합했다.

이후 각 도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13도 연합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했고, 탈환 작전은 실패했다.

의병장 허위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호는 왕산이고 유생 신분으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했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 출신자로 참전했다. 일제가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연천·적성·삭녕·철원·양주를 돌며 경기의병을 이끌었다.

양주군 남면 출신 의병 권득수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1907년 대한제국군을 해산하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켜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약관의 나이에 경기도 지평과 이천에서 의병 60여 명을 규합해 거사했다.

권승묵 의병은 양주 태생으로 1909년 12월 강원호와 같이 물미장을 휴대하고 현재 양주시 남면(당시 경기 적성군 남면)에서 군수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돼 1910년 7월 1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양주시는 가래비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줄곧 연다.
양주시는 가래비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줄곧 연다.

권준은 적성 태생으로 2차 의병전쟁 시기에 의병장으로 경기서북부 양주·파주·적성에서 활동했다.

이 말고도 양주 상동면 출신 김덕현, 양주 태생 김병기가 일제 침략을 저지하고 의병에 참여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양주 태생 항일민족운동가 중 한 명인 조소앙은 경기 양주군 남면 황방리 사람이다. 본명은 용은으로, 1911년 3월 일본 동경메이지 대학 법과에서 유학하던 중 중국 상해에서 다시 망명길에 오른 이승만이 동경에서 체류할 때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듣고 반일민족사상과 독립사상을 갖게 됐다.

이후 1913년 중국 북경을 거쳐 상해로 망명해 신규식·박은식과 동제사를 박달학원으로 개조해 혁명 청년들을 훈련하면서 진영사·황각과 함께 신아동제사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 단체로서 대동당을 조직했다.

1915년에는 구국 종교로 민족 대동단결을 이끌려고 육성교를 제창했다. 이후 일본 동경으로 파견돼 2·8독립선언 기회를 조성하고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또 신규식과 혁명당을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 헌장과 임시의정원법 제정에 참여했다.

1878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서 태어난 이사범은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서 김대현·안종태·안종규·조필선과 함께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해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틀 뒤인 3월 28일에도 그는 안종규 주도로 군중 600여 명과 함께 백석면 오산리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백석면사무소까지 행진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 홍성준 양주문화원장 인터뷰

-양주문화원을 소개한다면.

▶양주문화원은 1961년 3월 5일 양주군 이담면(현 동두천시)에 양주문화원으로 개원했다. 향토문화 창달을 위한 전통문화 계승·계발·보존·보급·선양과 향토사 발굴·조사·연구, 자료 수집·보존 그리고 지역 문화행사와 문화활동사업을 수행했다.

1981년 6월 30일 양주군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하면서 분리했다. 동두천시가 승격하면서 양주문화원으로서 활동이 유명무실해졌다. 그래서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땅을 기부하고 성금을 모았고, 여기에 정부 지원으로 1987년 4월 다시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듬해 2월 문화공보부장관 설립 허가를 받아 12월 양주군 광적면에 개원했다.

지방문화원진흥법을 1994년 1월 7일 제정해 시행했으나 2010년 5월 10일 양주문화원 지원·육성에 관한 조례를 제486호로 제정했다.

-양주지역 의병활동 의미는.

▶군대 해산 직후 의병활동은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더구나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허위·이은찬·윤인순·정용대 의병장이 강력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이름 있는 의병장 지휘 아래 해산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 명분뿐만 아니라 전투력·무기에서도 당초 의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달리 양주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적극 협조함으로써 이점이 컸다.

군대가 해산한 뒤 의병투쟁은 반침략·반봉건 성향을 보였다. 양주의병은 첫째, 일제 침략 세력에 기생하는 매국 관료나 일진회 회원, 순사보조원, 헌병보조원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처단하거나 압력을 가했다.

둘째, 조세를 거부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조세를 의병부대에 납부하게 해 군자금으로 확보했다. 이는 일제 매판정부 조세 수탈을 일제 침략과 동일하게 여기고 이를 저지하는 일을 반침략운동으로 인식했다.

셋째, 지주에 대한 반봉건 투쟁으로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료 거부와 추곡 수매 대금을 탈취했다. 그리고 지주에게 납부하는 소작미 방출을 저지하는 방곡령을 내고 이를 어기는 자는 응징·처단했다.

마지막으로 위에 열거한 반봉건 투쟁 전개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주민들이 스스로 의병에게 정보를 제공함은 물론 의병을 숨겨 주기도 했다. 한말 후기 의병 중에서 양주지역 의병투쟁은 일제를 항상 긴장하게 했고, 이는 의병 항쟁사에서 빛나는 업적으로 남았다.

-양주시민들에게 한마디.

▶양주문화원은 지역문화를 창조하고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항상 노력하며 앞장서겠다. 아울러 양주 문화와 역사를 보존·계승하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시민 문화 욕구를 충족하고 시대에 적응해 주민들이 문화생활을 향유하도록 문화원은 적극 활동할 방침이다. 양주 역사와 문화 전반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양주문화원에서 만나게끔 하겠다.

시민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하고 이용하도록 항상 열어 뒀으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양주문화원이 시민들에게 문화원으로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지역 문화와 역사를 전달하는 창구 구실을 하겠다.

많은 분들의 고견을 부탁드린다. 온고지신 정신으로 양주 역사와 문화 발전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양주=전정훈·안유신 기자 ays@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