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간 대립이 격화한다. 한일 외교 문제 차원을 넘어 국내 정치권에서도 찬반 논란이 가열되는 양상이다. 해방한 지 78년이 흘렀지만 우리 국민의 반일 감정은 이번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뿐 아니라 그간 위안부 문제 들에서도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런데도 우리 지역 선조들이 어떻게 이 땅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저항했는지는 미처 알지 못한 채 반일 감정만 앞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화성 제암리로 상징되는 경기도 항일투쟁 역사가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투를 벌였던 경기북부 항일 투쟁지를 다시 돌아보면서 경술국치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피해자와 가해자인 한일 관계 변화를 염원한다.

파주 교하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참석자들이 만세시위를 재현했다.
파주 교하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참석자들이 만세시위를 재현했다.

# 경기북부 의병운동

경기북부지역은 한말 최익현 의병장을 비롯해 다수 의병장을 배출했다. 적성, 연천을 비롯해 임진강과 양평처럼 산악지대가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했고, 허위를 총대장으로 하는 연합의진 투쟁은 대표 의병사로 손꼽는다.

영국 매켄지 기자가 촬영한 ‘양평의병 13인’ 사진으로 대표할 정도로 양평지역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한 의병활동은 국내 의병활동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다음 달(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양평 지평 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끈 포수 400여 명은 전국 최초로 창의했다. 지평의병으로 지칭하는 이들은 최초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충북에서 의병이 봉기하는 도화선이자 항일의병의 효시가 됐다.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에 있는 ‘지평의병·지평리전투 기념관’에 가면 양평이 의병 봉기의 거점이 된 설명부터 주요 인물에 대한 설명을 눈으로 보게 된다. 양평 출신 의병장과 이 지역을 주 무대로 한 의병들의 활약상, 종군기자인 매켄지가 본 양평 일대 항일의병과 일본군의 잔혹성을 설명한 내용까지 상세하게 확인 가능하다.

양평 말고도 1907년 일본이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뒤 포천과 양주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포천 출신 조인환은 양평 용문산을 근거지로 해 의병진을 이끌고 양평 관아, 세무서, 우편소, 일본인 가옥을 습격하거나 방화하는 활동을 했다.

양주 출신 윤인순은 양주·파주·적성·포천을 무대로 허위의 연합진에서 활동했고, 허위가 체포된 뒤에도 계속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 수비대와 전투 중 숨졌다.

연천군에 세운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연천군에 세운 항일독립운동기념탑.

# 경기북부의 3·1운동

서울과 지리상 멀지 않은 고양·파주·양주·양평 일대에서는 1919년 3월 10일부터 3·1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학생과 종교계 지도자의 선도 투쟁이 있었고, 차츰 농민이 투쟁 주체로 나서는 양상으로 번졌다.

양주군은 16개 면 중 14개 면이 참여했고, 산 위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거나 횃불 봉화 시위, 유인물 배포 같은 행위로 주민 참여를 촉구했다. 이 중 마석우리 만세시위는 양주군에서 첫 번째 유혈 사태가 발생한 시위다. 일제 탄압으로 시위 주도자들이 체포되자 시위대는 무장한 헌병대에 맞서 헌병주재소, 면사무소를 습격하는가 하면 공세를 취하며 저항했다.

3월 말 전개한 양주군 지역 독립만세운동에서도 이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장흥면사무소에 모인 시위대는 출동한 헌병에 저항하면서 헌병보조원의 총기를 빼앗는가 하면 극렬히 맞섰으며, 시위대 해산 과정에서 사망자 1명과 다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김성숙을 비롯한 봉선사 승려가 중심이 돼 독립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양평군 지역 3·1운동은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이어졌고, 경기도내 다른 지역에 견줘 규모 면에서 방대했을 뿐 아니라 시위 양상도 격렬했다. 주로 장날을 이용한 대규모 시위가 잦았는데, 3월 24일 장날에서 벌어진 갈산면민 만세시위는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면사무소와 군청에서 만세를 부르거나 군청을 습격해 세금 관련 서류철을 파기하기도 했다.

고양 시민들이 행주나루터에 세워 둔 배에서 선상 시위 중이다.
고양 시민들이 행주나루터에 세워 둔 배에서 선상 시위 중이다.

# 파주 곳곳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

1919년 3월 10일 구세군 교인 임명애는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 100여 명을 독려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임명애가 선창하자 학생들도 따랐고, 이 시위 이후 25일 김수덕과 김선명이 임명애 집에 가서 독립운동을 의논하고 주민을 모으려고 등사판으로 격문을 만들어 와석면 당하리 일대에 배포했다. 27일 염규호·김창실·김수덕은 인근 동리에서 모여든 군중 700여 명을 인솔해 와석면사무소에서 시위 행진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에게 휴무하기를 요구했다. 이어 군중 500여 명이 교하헌병주재소 부근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했다. 이에 파주분견소에서 급파한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당하리에 사는 최홍주가 그 자리에서 숨졌고 군중은 해산했다.

같은 날 봉일천 공릉장날을 기해 펼친 공릉장터 만세시위는 파주지역 최대 규모다. 광탄면 신산리에 사는 심상각의 주도로 김웅권·권중환·심의봉·이근영·유영을 비롯한 19명은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파주지역뿐 아니라 인근 고양군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 시위를 이튿날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광탄면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군중 2천 명은 봉일천리 공릉장으로 행진했다. 그곳에는 이미 군중 1천여 명이 시위 중이었고, 불어난 인원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하던 군중들이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자 일본 헌병이 무차별 발포했고,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 외세 침략을 막으려는 행주산성 기개

고양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1일 신도·벽제·지도면 일대에서 군중 수백 명이 만세를 불렀다. 지도면 행주외리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이날 밤 등불을 신호로 야산 시위를 강행한 지도면 행주내리와 행주외리 주민들은 일제 경찰이 따라오자 강에 배를 띄우고 선상에서 만세를 불렀다. 주민들은 "옛날 임진년에 이곳에서 왜놈들이 망했다고 하거니와 만일 쫓아오면 네놈들도 그와 똑같이 망하리라"고 외쳤다.

같은 달 24일에는 군중 8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28일에도 군중 500여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가 헌병을 시켜 시위주동자 38명을 체포하고 해산했다.

중면에서는 25일 밤 주민 50여 명이 일산리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일산 장날을 맞아 장터에 모인 중면 주민 약 500명은 야간을 이용해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는가 하면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이날 일본 헌병은 주민 15명을 체포했다.

28일 밤에는 주민 150여 명이 모여 횃불을 밝히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헌병이 출동해 면서기 1명을 포함해 주모자 19명을 검거하고 주민들을 해산했다.

영국 매켄지 기자가 사진으로 담은 양평 의병 13인은 국내 교과서에 실려 유명하다.
영국 매켄지 기자가 사진으로 담은 양평 의병 13인은 국내 교과서에 실려 유명하다.

# 항일 의병 주둔지 연천

심원사는 한말 연천·철원지역 의병부대가 주요 거점지로 삼아 활발한 전투를 전개한 절이다.

1907년 9월 25일 의병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자 일제 김화수비대는 심원사 일대 각 방면을 포위한 채 공격했다.

26∼27일에 걸쳐 의병들은 일본군과 법화동과 대광리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화력 열세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후퇴했다. 일본군은 의병의 은거지가 된 심원사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1907년 11월 8일에는 헌병 18명이 수비하던 마전 서남쪽 두일성 천신면에 의병 약 1천 명이 마전읍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마전 일제 헌병분견소는 앞서 마전 부근에 있는 의병이 새벽에 마전읍내에 내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철원헌병분견소에 급박하게 증원을 요청했다. 김화수비대에서 파견한 일본군이 후방에서 공격하는 바람에 의병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사상자 20여 명을 내고 퇴각했다.

이듬해 2월 24일에는 연기우와 이근배를 비롯한 의병 20여 명이 신서면에서 연천수비대와 통신하려고 출장한 헌병들과 마주쳤다. 연기우와 의병 20여 명은 사격을 했고, 잠시 뒤 약 30명이 나타나 연기우 의병부대를 지원했다.

급보를 듣고 철원분견소장 일본군 대위가 하사 이하 12명을 거느리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의병은 없고 일본군 시신과 부상당한 말을 발견했다. 이근배는 이후 체포돼 경성공소원에서 강도살인죄를 적용 받아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이근배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참고자료= 국가보훈부 인천·경기북부 독립운동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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