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불복종해 조국을 탈출한 러시아인 안드레이(가명)와 디미트리(가명)를 만났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4일 우크라이나를 나치처럼 만들지 않겠다며 전쟁을 감행했다. 급조한 전쟁 명분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조국을 탈출하거나 국내에서 투쟁하면서 저마다 방식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지난해 9월 탈출 행렬 속에서 러시아 청년 5명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건 난민 심사 거부와 9개월간 억류 생활이었다. 올 6월 2일 난민 심사 자격을 얻으려고 진행한 재판에서 안드레이와 디미트리는 승소했다. 9개월 만에 두 사람은 난민 심사 ‘자격’을 얻었다. 

이 과정을 안드레이는 "감옥 같았다", 디미트리는 "우리를 믿지 못하고 이렇게 대우하다니 놀랍다"고 표현했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두 사람이 계획하는 일은 무엇인지 얘기를 나눴다.

난민 인정 투쟁 중인 러시아 안드레이·디미트리.
난민 인정 투쟁 중인 러시아 안드레이·디미트리.

#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단식

안드레이와 디미트리는 부당한 전쟁을 명령하는 조국에 불복종해 한국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0월 6일 한국에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무부는 두 사람 입국과 난민 심사를 거부했다. 

디미트리는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너무 혼란스럽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회상했다. 

당시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직원이 디미트리에게 안드레이를 소개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유엔난민기구(UNHCR)에 도움을 구했다. 난민기구는 두 사람에게 변호사 이종찬 씨를 연결했다.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두 러시아인은 공항에서 생활했다. 5개월 동안 안드레이와 디미트리는 하루 3차례 배급받은 빵과 주스만 먹고 지내야 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공항 승객용 공용 화장실에서 목욕했다.

안드레이는 "공항 생활은 한마디로 정도 없고 어려웠다"고 했고, 디미트리도 "끝없는 관광객들, 유리 뒤로 비치는 햇살과 공기, 계속되는 밤하늘은 매우 우울하게 했다"고 표현했다.

첫 번째 재판에서 승소한 뒤 법무부는 두 사람을 공항 근처 외국인지원센터로 보냈다. 

누군가 두 사람을 면회하거나 두 사람이 외부로 나가는 행위는 막았다. 센터에선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고 일주일에 한 번 도시로 나가 쇼핑할 기회와 돈을 주지만, 두 사람은 무엇도 받지 못했다.

안드레이는 "나는 22일 동안 단식했다. 그러자 외부 방문도 인정했고 수업도 진행했다"고 했고, 디미트리는 "그곳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 유령 인간

안드레이와 디미트리는 한국 정부가 보여 준 태도에 실망한 눈치다.

안드레이는 "센터는 감옥 같았다. 그곳에 지낼 때 매우 힘들고 지쳤다. 오직 변호사만이 우리를 격려했다. 다시 한번 변호사가 보여 준 헌신과 노력에 감사를 보낸다"고 했다.

디미트리는 "직원들은 규정에 맞게 행동했다"면서도 법무부 판단에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지 못해 ‘없는 사람’처럼 대우하는지, 대한민국 법무부는 작은 일에는 주목하지만 중요한 위반 사항은 모르는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래도 직원 중에 우리를 걱정한 분들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 난민 심사는 언제

두 사람은 난민 심사를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했다. 의료 검진을 받고, 주소를 등록하고, 정부에 신청서를 제출해 ID카드를 받아야 비로소 난민 심사는 시작한다.

안드레이는 지금 당장 돈이 없어 난민 심사를 조금 늦게 할 계획이라고 한 반면, 디미트리는 빠른 시일 안에 서류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했다.

# 명분 없는 전쟁

두 사람은 이번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조국을 배신하는 일이지만, 정의 없는 조국 결정에 결코 따르지 못하겠단다.

안드레이는 "이 전쟁은 옳지 않고 애시당초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고 잘라 말했다. 디미트리 역시 "최근 러시아 상황은 불안정하다. 전쟁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동원도 점점 심해진다"며 "나는 정치를 모르지만 이런 불안정한 상황은 그 어떤 특정 정치인들에게만 유리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러시아 시민들이 평화를 원한다. 이번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그들은 빠른 평화를 기원한다. 안드레이와 디미트리는 "러시아 권력은 부패했다. 이 일에 관해 러시아는 모든 수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며 "동원되는 사람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자식이다. 빨리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전쟁에 사용하는 자원을 국민과 나라 발전에 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인천 시민단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퍼포먼스. <기호일보 DB>
인천 시민단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퍼포먼스. <기호일보 DB>

# 한국 민주주의 발전 믿었는데… 

안드레이와 디미트리는 저마다 한국에 관한 사연이 있다. 

안드레이는 "나는 러시아에서 부패를 규탄하는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며 "러시아에선 한국처럼 전직 대통령이 유죄판결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과거 한국 전직 대통령이 유죄판결을 받은 일에 매우 감명받았다. 한국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믿었기에 이곳으로 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한국은 나를 받아들이고 도와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도움을 구하기 전 9개월 동안 감옥과 같은 삶을 보냈다. 난 그 정도로 나쁜 대우를 받을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한국 역시 이해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안드레이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뒤 계획은 세우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으로선 조국을 배신한 혐의로 종신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공항에서 인터뷰를 할 때 FSB(러시아 연방보안국)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인터뷰를 방해하고 회유하고 협박했다"고 전했다.

드미트리는 한국에 남을 계획이다. 그는 "난민으로 인정받는다면 여기서 일하고 싶다.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올 때마다 언제 한국으로 데려가냐고 묻는데 마음이 아프다"며 "가족들이 그립다. 이 전쟁으로 어떤 관료는 수백만 달러를 버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사랑하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했다.

# 지지해 준 변호사와 한국 사람에 감사

두 사람은 자신들을 지지한 한국인들과 변호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안드레이는 "나는 많은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을 도울 준비가 됐다고 믿는다. 역경도 많았지만 나를 도와주고 지지해 준 한국인들도 많았다. 그분들께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드미트리 역시 "먼저 우리를 도와준 변호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 사연이 TV에 소개된 뒤 많은 분들이 친절하게 말해 줬다. 매우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를 향한 나쁜 반응도 많았다"며 "잘못된 선택을 한 조국을 등졌다는 얘기를 들어도 상관없다. 국적은 달라도 사람은 옳은 판단을 항상 해야 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결정으로 겪는 고난은 받아들일 생각"이라고 했다. 

정성식 인턴기자 jss@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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