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소방관.
김준태 소방관.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촌놈으로 통했던 나는 전역과 동시에 인천으로 올라왔다. 서울에서는 올림픽을 열고 젊은이들이 꿈을 품고 도시로 향하던 그해 내 나이는 24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턱대고 가방만 하나 달랑 들고 인천으로 올라온 나는 기반조차 없었고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소방이 아닌 검찰 사무직을 준비했고, 독서실 실장을 맡아 숙식을 해결했다. 고시 공부가 그렇듯 책상에서 책만 뚫어져라 보던 어느 날 형님 한 분이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소방공무원도 괜찮다는데…." 

소방공무원, 생소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흥미가 생겼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화재 사고 뉴스가 나왔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소방대원들은 마치 영웅 같았다.

불길을 헤치며 시민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어떤 생각을 하든 결론은 같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형님은 "너처럼 신체 건강한 놈이 해야지 누가 해"라며 용기를 줬다. 이를 계기로 소방관이 되려는 꿈이 생겼고, 머지않아 시험을 치렀다. 

당시에는 설마 될까 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치렀다. 기간이 너무 짧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한데 운이 좋았는지, 준비를 잘했는지 단번에 합격했다. 1988년 6월 20일 나의 소방관 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화재 현장을 브리핑하는 김준태 인천소방본부 119재난대책과장.
화재 현장을 브리핑하는 김준태 인천소방본부 119재난대책과장.

# 소방관 김준태

꿈꾸던 소방관이 되고 난 뒤 행복한 나날만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988년 10월 인천중부소방서 항만센터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유독 쌀쌀했던 가을밤 화재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에 갔다. 원룸 화재였고 방화사건으로 기억한다. 건물은 불에 휩싸였고, 선배들과 나는 건물로 진입했다. 화재를 진압하려고 계단을 오르던 중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방화범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온몸이 타 들어갔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살리려고 계단까지 옮겼다. 선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압 준비를 했지만 나도 모르게 건물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시신과 냄새, 머리가 어지러웠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선배가 날 불렀다. 순간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황급히 다시 건물로 들어가 화재 진압을 도왔다.

선배는 처음부터 너무 좋지 않은 현장을 목격해 그렇다며 나를 다독였고,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했다.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현장 생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양치질을 수십 번 해도 입안에 밴 냄새가 가시질 않았고, 꿈에 나올까 잠을 청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동네만 빙빙 돌았다. 3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 사건에도 덤덤해졌지만, 아직도 가끔 꿈에 그때 장면이 선명하게 나온다.

과거 화재현장에 출동해 불을 진압하는 모습.
과거 화재현장에 출동해 불을 진압하는 모습.

# 퇴임 그리고 새로운 시작

소방에 늘 감사함을 느낀다. 소방에 근무하면서 돈을 벌었고 아내를 만나 가족을 꾸렸다. 퇴근한 뒤 편하게 쉴 집이 생겼고, 날마다 발이 돼 주는 차도 샀다. 소방은 나에게 삶을 선물했다. 이에 소방에 보답하고 싶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퇴임한 뒤 해야 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된다면 소방을 꿈꾸는 새싹과 젊은 대원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싶다. 이들이 느끼는 고충을 듣고 대화를 나누며 내가 겪은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면서 고민을 해결해 주고 싶다. 기반이라는 비료를 뿌린다면 새싹은 분명 더 멋지게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가족과 여행을 갈 계획이다. 생각해 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십 년간 가장 자리를 비웠다. 아내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한 듯싶고, 아들에게도 미안한 감정이 크다.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나머지 가족들은 아버지와 가장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으리라 예상한다. 많은 시간을 기다린 만큼 가족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일에 치여 그동안 가 보지 못했던 곳으로 여행도 가고, 하지 못했던 경험도 많이 해 볼 계획이다. 책을 읽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남들은 살아가면서 직업을 5번 혹은 그 이상 바꾼다고 한다. 컴퓨터 발전과 정보사회 그리고 학벌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사회복지사를 시작해 볼까 생각 중이다.

소방공무원이 되고 35년이란 세월을 인천에서만 생활했다. 이제 인천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인천은 분명 좋은 도시지만 아직 뒤떨어진 곳이 많아 열악하거나 힘든 이들이 많다. 그들을 도우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려 한다.

과거 해안 순찰에 나섰던 김준태 과장.
과거 해안 순찰에 나섰던 김준태 과장.

# 후배들에게

정년이 2년 남짓 남았다. 긴 시간 많은 일을 겪었다. 슬픔에 잠겨 울어도 보고 기뻐서 웃기도 했다. 모두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동료들 덕에 버텼다.

소방대원은 감정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 나가 참혹한 장면을 직접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들어오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감정에 잠식당하고 만다.

"내가 더 빨리 왔으면, 내가 더 잘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번번이 자책하지는 말아야 한다.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늘 강조하는 한 가지.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라." 누구에게나 다 처음이라는 시작점이 있다. 내 선배가 다른 이에겐 후배였고, 내 후배 역시 훗날 다른 이에겐 선배가 된다.

소방은 생명과 직결된 집단이다. 그 특성에 맞게 끈끈한 전우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 서로 기대고 기쁠 때는 같이 웃어주는 그런 사람 냄새 나는 집단이어야 한다.

다행히 열악한 과거와는 달리 현재 소방환경은 매우 좋아졌고, 소방을 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소방이 달라진 데는 대원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 역시 함께 힘쓴 결과라고 생각한다. 좋은 선배가 되려고 노력했고 열심히 했다.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 또 다른 이에겐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일지 몰라도.

소방 지휘통제실에서도 근무했다.
소방 지휘통제실에서도 근무했다.

# 대를 잇는 소방관 아들

"아버지처럼 자랑스러운 소방관이 되겠습니다." 4년 전 대학생 아들이 한 얘기다. 갑자기 나와 같은 길을 선택한다는 아들 말에 기쁘기도 했지만 머리가 복잡해졌고 처음에는 반대했다.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화재로 목숨을 잃은 시신을 보거나 함께한 동료의 죽음까지 보게 되는 경우도 잦다. 그 잔혹함에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르고, 직업 특성상 건강도 악화할지 모른다.

소방대원은 단명하거나 희귀병에 걸리는 경우도 다른 직업군보다 많다. 화재 현장에서 같이 근무한 선배는 스트레스와 가스 흡입으로 백혈병에 걸렸다. 공상처리라도 하고 싶어 여기저기 많이 뛰어다녔지만 입증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기억과 내가 현장에서 느낀 감정들을 아들이 경험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 눈을 보고 뜻을 꺾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웃으며 대화하던 아들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하고 싶다"고 했다. 아들이 기특하기도 했고, 후배라도 합격점을 줬으리라.

어느 부모나 그렇듯 자식이 위험한 일을 하려 한다면 선뜻 이해할 부모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길이 옳은 길인데다, 자식마저 그 사실을 잘 안다면 막을 부모는 없을 테다. 아들은 벌써 나와 같은 소방에서 2년째 복무 중이다.

축하도 해 주고 격려도 해 줬지만 이 말은 직접 하지 못했다. 항상 하고 싶었지만 마주치면 말문이 막힌다. 여기서라도 전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네가 많이 자랑스럽다."  

유지웅 기자 yjy@kihoilbo.co.kr

사진=<인천소방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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