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주필
원현린 주필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주지하다시피 이 말은 로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신복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의 칼에 찔려 살해당하면서 배신자를 향해 부르짖었다고 전해지는 황제의 마지막 외마디 절규다. 이때부터 이 한마디 말은 철석같이 믿었던 상대방에게 배신 당할 때 흔히 인용하는 문구가 됐다. 

배신이라는 얼룩진 유산을 남긴 또 한 예로는 가롯 유다가 있다. 스승 예수(Jesus)를 배신하고 은화 30냥에 팔아넘긴 유다는 12제자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서양에서는 브루투스와 함께 유다를 배신의 상징으로 꼽는다.

배신의 역사는 오래다. 상기 말고도 떠오르는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어 본다. 병법서 「손빈병법(孫빈兵法)」을 남긴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장수 손빈(孫빈)은 방연(龐涓)과 더불어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고 귀곡(鬼谷) 문하에서 병학(兵學)공부를 했다. 손빈은 후에 동문수학 문우(文友)임에도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방연의 배신으로 빈형(빈刑: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벌)과 묵형(墨刑:죄인의 살갗에 먹줄로 죄명을 써 넣는 형벌)을 당하기까지 했다.

위왕(魏王) 조비(曺丕)는 한조(漢朝) 헌제(獻帝)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위는 조비가 신임하던 사마의(司馬懿)의 배신으로 조씨 왕조도 몰락했다. 

신뢰했던 지인에게 살해 당한 신라 장군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어이없는 최후 이야기도 전해진다. 평소 협객(俠客)을 아꼈던 탓에 자신을 찾아온 옛 부하 염장을 위해 환영연을 열었던 자리에서, 자신이 술에 취한 사이 믿었던 자에게 암살 당한 장보고다. 

조선조 단종(端宗)의 만고충신(萬古忠臣) 사육신(死六臣)을 밀고한 김질, 조정의 녹을 먹으면서 정사에 힘쓰기보다 자신의 무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배신과 악행을 일삼은 연산군 시대 임사홍은 희대의 간신이었다. 

배신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다. 며칠 전 한 광역자치단체장이 폭우로 인한 국가적 재난 상황 속에서 골프를 친 행위는 지역 행정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주민 배신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근자 들어 대장동 개발사업, 백현동 개발사업이니 하여 일확천금을 노리고 벌어지는 악취 나는 이전투구(泥田鬪狗) 현장에서 배신의 끝판을 본다. 한때 먹잇감을 놓고 도원결의(桃園結義) 흉내까지 내며 함께 가자고 맹세했을 일당들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사정이 변경됐다 해 하루아침에 서로가 등을 돌리고 철천지원수가 된 추한 군상(群像)들이다. 서로가 배신자라고 언성을 높인다.

목도하자니 역겹기까지 하다. 자신에게 이롭지 않으면 아는 것도 모른다고 부인하곤 한다. 법정에서 위증죄는 안중에도 없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거짓 증언도 불사하는 이들이다.

신의칙(信義則) 저버리기를 초개(草芥)같이 하는 시대다.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다는 붕우유신(朋友有信) 덕목 따위는 이제 도서관 고서에서나 찾는 세상이 됐다. 

지금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산다. 믿음이 사라져 모든 것이 불확실한 사회가 됐다. 약속을 지키면 바보가 되는 사회인가. 수많은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풍요를 구가하는 속에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의의 상실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배반을 이어가는 배신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신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정언명령(定言命令)도 이제는 들려오지 않는다. 속고 속이는 인간사(人間事)에 허탈할 뿐이다. 배신은 배신을 낳는다. 역사를 상고(詳考)하다 보면 배신으로 점철된 인류사(人類史)가 아닌가 사료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건 실추된 신뢰 회복이다. 그래야 건전한 사회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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