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함부로 데려오면 어떡해!" 지난 주말 시흥 거북섬 일원에서 연 ‘2023 한국관상어산업박람회’가 화근이었다.

엄마는 박람회 행사장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관상어를 무려 열 마리나 받아 왔다. 물고기 네 마리, 새우 네 마리, 달팽이 두 마리. 어항도 없는데 어쩌려나 싶던 차에 엄마는 약속이 있다며 녀석들을 플라스틱 잔에 풀어놓은 뒤 집을 나섰고, 홀로 남은 기자는 버스로 30분 거리인 수족관에서 5㎏은 좋이 나가는 어항과 모래, 여과기를 씩씩거리며 사 온 뒤 쏘아붙였다.

수조 세팅을 마쳤을 땐 더위 때문인지, 좁은 환경 탓인지, 물고기와 새우가 한 마리씩 이미 폐사한 뒤였기에 죄책감에 더 열이 올랐다. 엄마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데려왔다며 머쓱해 했다. 오히려 땀을 뻘뻘 흘리며 수조에 여과기까지 설치한 기자를 신기해하는 기색이었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새우. 그날 아침 우리집 식탁에 오른 애호박찌개에도 그런 새우가 몇 마리 둥둥 떴기에 그 관상어들은 엄마에게는 생명으로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엄마를 이해했다. 그런데도 무감함이 미웠고 무책임에 화가 났다.

고백하자면 2년 전부터 관상용 새우를 키우고 싶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이유는 책임감이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늘 막연하고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왔기에.

그러나 고민만 하며 흘려보낸 시간을 책임감이라고 불러도 될까. ‘책임’을 뜻하는 영단어 ‘responsibility’는 ‘response(응답)’와 ‘ability(능력)’의 합성어로 풀어 말하면 ‘응답하는 능력’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귀에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반응하는 자세를 책임감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곧 책임이란 선행한 어떤 대상이 존재해야만 성립하는 사후 반응이란 소리다.

새우가 없이는 새우 주인으로서 책임 또한 없다. 고로 함부로 새우를 데려온 엄마의 대담함이 없었다면 기운 없이 바닥에 가라앉은 새우를 살리려고 응답한 기자의 고군분투도 없었을 노릇이다. 그리 생각하니 충동이든 얼떨결이든 의도와 상관없이 엄마의 대담이 아무래도 고마웠다. 책임감만으론 관계를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시작 뒤엔 용기 낸 누군가가 있는 법이고, 이번 경우 그 사람은 기자가 아니었다. 소중한 새 식구를 반기며 더 대담한 내일이 되길 바란다. 

<윤소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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