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오랜 기간 초·중·고 학생들에게 크게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장래 희망하는 직업으로 교사가 단연 선호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심지어는 한때 직업 선호도에서 부동의 1위를 달렸다. 물론 경험이 많지 않고 인생관이 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미치는 교사의 선한 영향력이 크기 때문일 테다. 이는 마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효용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모님이라고 대답하는 어린이들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인 교사는 스스로 얼마나 만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할까? 또한 자신이 교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당당하게 신분을 드러낼까? 요즘 필자는 40년을 교사로 살아오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에 얼마나 주저 없이 답했는지 물음의 시간을 가져 본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자신이 쥐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청년에게는 무척 심각한 정신적 문제였다. 장기간 입원 치료 후 그는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을 나서던 청년은 혼비백산 사색이 되어 의사에게로 뛰어왔다. 병원 입구에서 길고양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당신은 이제 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잖습니까?" 청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당연하지요. 그런데요, 저놈의 고양이가 문제입니다. 저 고양이가요, 제가 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잡아먹겠다고 덤벼들면 어쩌겠어요?"

썰렁한 아재 개그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는 무거운 의미를 내포한다. 시나브로 진정한 자아 정체감이란 무엇일까를 성찰하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시선을 얼마쯤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 정체성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벗어나 누가 뭐라고 해도 ‘나다움’을 깨닫고 그 연장선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과거 선생님들과 수업 나눔을 하다 보면 그 특성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었다. 학생들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가르치는 ‘아기 엄마형’, 친구처럼 편하고 거리감이 전혀 없어 아이들이 쉽게 접근하는 ‘또래 친구형’, 카리스마와 자신감으로 열변을 토하는 ‘군대 지휘관형’, 매끄러운 목소리로 어려운 개념도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스타 강사형’, 수업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고 무게가 실리는 ‘성직자형’, 털털한 성격에 무엇이든 수용할 듯싶은 ‘이웃 아저씨형’….

그렇다면 어떤 유형이 가장 교사답고 훌륭할까? 각각의 유형이 가진 장점을 잘 받아들이면 좋은 교사가 될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요즘 교사들 사이엔 ‘생존권 확립’ 문제가 심각하다. 행정업무에 시달리다 못해서 이제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견디다 죽음의 선택지가 얼쩡거린다. 이제 교사는 자신이 속한 유형의 장점을 잘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누구나 자기 색깔이 있고 이를 정체성으로 간직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지개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 색깔의 물감을 다 섞으면 거무튀튀한 색깔이 되지 않겠는가? 또 맛있는 음식도 한곳에 뒤섞으면 잡탕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교사는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까? 중요한 점은 수업에서 ‘나다움’을 간직하는 것이다. ‘군대 지휘관형’이든 ‘스타 강사형’이든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굳어진 특성이자 유형이다. 그것이 교사로서 진정한 나다움이나 정체성은 아니다. 이 선생님은 토론수업의 선두 주자이고 저 선생님은 협동학습의 달인이며 그 선생님은 문제 해결 학습에서 앞서 간다는 식의 교수·학습 방법상 개별적 특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배우는 학생들이 다양한 학습 방법을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교사의 책무다. 교사가 확실한 정체성을 갖지 않으면 그를 ‘쥐’라고 여길 ‘고양이들’이 어디서든 나타날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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