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백로(白露),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절기가 지났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 하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굵고 튼실한 올배와 당도 높은 먹골배가 침샘을 돋우고, 반지르르하게 영근 청포도(샤인머스캣)알 송이송이가 눈길을 끈다. 절기 ‘백로’에 때맞춰 같은 발음의 동기감응인 양, 동네 근처 시냇물 여울목에 발 담근 채 물끄러미 조는 새 ‘백로(白鷺)’가 이채롭다. 

며칠 전 홀로인 날, 밤새도록 귀뚜리가 울었다. 비교적 높은 아파트지만 집 안 곳곳 온갖 화초들과 어울려 살아온 사반세기 봉실(蓬室)이다 보니 발코니 화목 틈새 어딘가로 찾아온 모양이다. 귀객이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마침 거기 서 있던 구아버 나무가 다 상기된 듯하다. 가을의 전령사 귀뚜리와의 만남은 여태 그 울음소리가 물둘레처럼 속내로 퍼지는 통에 주체할 수 없는지 오종종한 열매들이 시나브로 발개졌다.

예기치 않은 불청객과의 무언의 대화는 갖은 생각을 불러왔다. 예나 이제나 귀뚜리는 시문의 제재로 많이 활용됐다. 주로 외롭고 소외된 자들의 소통과 대변의 상징이었다. 서러움, 속눈물, 신음소리, 이별, 혼잣술, 타향살이, 상실, 죽음 등등 시어는 온통 이런 것들로 도배된다. 나아가 대중가요나 클래식 음악으로도 회자된다.

귀뚜리의 일생은 알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1년이요, 주 활동 시기는 8~10월 석 달간이다. 야행성인 귀뚜리 수컷의 울음소리 하나만으로 의인화나 독백체를 통한 수사법으로 환원돼 마치 귀뚜리의 전부인 양 치부된다. 그것은 인간이 그 소리 하나만을 가지고 끌어다 쓴 용도일 뿐, 실상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거개가 모른다.

나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랬기에 애완용 거래, ‘실솔싸움대회’ 출전, 식용 먹거리 재료 같은 역할을 간과했다. 과자 귀뚜라미 바, 귀뚜라미 꼬치구이에다 상표 귀뚜라미 보일러가 낯설지 않다. 일각에서는 미래 단백질 공급원이라고 할 만큼 귀뚜리는 우리 인간에게 익충 중의 익충이다.

백로 이전 절기는 처서(處暑)였다. 처서 무렵이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거나 풀도 울고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밭두렁 억새풀이 누레지고 텃밭 호박잎이 한풀 숙어지니 뒷말은 맞는 듯한데, 앞말은 올해 맞지 않다. 그 다음 백로가 지나서야 모기가 좀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그때까지 내 봉실의 여름밤은 온통 모기 천국이었다면 과장일까. 모기향도 켜지 않고 사방 문을 열어놓은 채 전자 모기채와 물파스로만 지내다 보니 다니러 온 자식들이 힘들어한 건 당연했다. 

지나친 청결주의로 일상 세상과 유리돼 살아온 사람이 되레 질병에 걸리기 쉽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은 음양의 조화 속에 만물이 다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라는 게 내 어쭙잖은 생각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올 여름 후텁지근한 날씨에 사정없이 물어대는 모기 공격에는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좀비 모기’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통상 모기는 알에서 성충까지 12일, 수명 2~3주인데 요새는 길게 6~8개월을 산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사는 모기가 좀비 모기다. 

밤에 불 끄고 눕자마자 어느새 앵 귓전을 울리면 이미 몸 어딘가는 흡혈을 당했을 수 있다. 30m 밖에서도 피 냄새를 감지하고 찾아와 30초 만에 정확히 혈관에 주둥이 빨대를 꽂고 피 빨아먹은 뒤 달아난단다. 그 피로 100여 개 이상의 알을 낳아 번식하는 모기는 오늘날 세계 약 3천500종 110조 마리나 된단다. 지난해 말라리아, 일본뇌염 등 모기 전달 질병으로 인한 사망인원이 약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모기는 인간에게 해충 중의 해충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시문의 대상이 아닌 것도 아니다. 조선 말엽 정 다산의 한시 ‘증문(憎蚊)’을 비롯해 이즈음에는 오히려 시집 제목으로도 활용됐다. 문학의 ‘낯설게 하기’나 역설적 효과를 바랐는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 인간 처지에서 두 곤충을 살펴보면 귀뚜리는 공생할 수 있음에도 짧은 기간 함께하기가 쉽잖고, 모기는 공생할 수 없음에도 상당 기간 함께해야 한다. 인간도 서로에게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시련 극복이 인간성 진화를 위한 신의 손길인지 묻게 된다. 시조 올린다.

- 생명의 의미 - 

처서에 여름 모기
피 먹어야 살 팔자요
 
백로에 갈 귀뚜리
피 아녀도 살 팔자니
 
다같이
가는 밤살이 길
어이 그리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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