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고원에 자리 잡은 요르츠에서 트레킹 대원들이 휴식을 취했다..
파미르 고원에 자리 잡은 요르츠에서 트레킹 대원들이 휴식을 취했다..

칼라이 쿰부에서 오전 4시 출발했다. 어둠과 먼지 속에서도 7호차 현지 운전기사 누르베키는 잘도 달린다. 핀즈강을 사이에 두고 아프가니스탄을 마주 보며 약 5시간을 달린 끝에 호루크시에 도착했다.

호루크는 타지키스탄 유명 남부도시다. 물류 교역 중심지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변에 드문 번화 도시였다. 호루크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산식물원(2천200m)이 있어 모두 방문했다.

여기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채경석 대장이 식물원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50대 한 여성이 실신했다. 다행히 주변 사람이 바로 부축했고, 남편이 달려오고 간호사 출신 여성 산악인도 달려가 곧바로 진정했다.

오늘은 2천200m 키에카스(Kivekas) 호텔에 머물지만 내일은 3천37m 이스카쉼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게 된다니 벌써부터 긴장된다. 

나에게도 신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과 3일 만에 입술이 터졌다. 또 건조한 고산 날씨에 발 각질이 벗겨져 아팠다. 다행히 각질 양말을 가져왔지만 건조한 날씨를 견뎌 내지 못했다. 신체에 약한 부분이 먼저 고장을 예고했다. 서둘러 선제 조치를 취했지만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한 가지 의문사항이 들었다. 타지키스탄에서 차로 파미르 하이웨이를 이동하면서 우리는 같은 나라 안에서 자주 검문을 당했다. 이유는 내국인들에겐 거주 이전 자유가 없어 사전에 당국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여권 검사가 필수였다. 사회주의 잔재가 남았음을 실감했다.

엄혹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현지인 가족들.
엄혹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현지인 가족들.

키에카스 호텔에서도 정전은 자주 일어났다. 미리 준비한 헤드 랜턴을 켜고 일기를 쓰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외국인들을 위한 호텔이고 겉모습은 그럴 듯했지만 정전은 올 때 갈 때 모두 빠짐없이 계속됐다.

그나마 호루크 호텔은 좋은 편이었다. 그 다음 이동한 도시는 이스카쉼으로, 고도는 2천500m로 높아졌다. 본격 파미르고원 트레킹을 시작하는 셈이다. 여기서 힌두쿠시산맥과 파미르가 만나는 역사 통로인 와칸회랑을 지난다. 마르코 폴로, 현장, 법현 스님이 지나간 곳으로 유명하다.

더구나 이스카쉼에는 고지대에 온천이 있어 온천욕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온천욕을 포기했다. 

우리는 다시 이스카쉼에서 란가르(2천900m)로 이동했다. 다시 좀 더 위로 올라가 3천400m 고지대 비비 파티마 온천에 단체로 들어갔다. 이런 고지대에 천연 실내 온천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뜨거운 천연 온천에 모두 발가벗고 들어갔다. 도시의 묵은 때, 고뇌와 잡념을 웃음으로 온천에 던지고 우리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모두들 차츰 현지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나의 터진 입술도 회복 중이었다. 쥐가 내리던 왼쪽 다리도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란가르 게스트하우스에서 우리는 밤하늘을 보며 무수한 별을 노래했다. 선 너머 밝게 솟아오르는 달을 보며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를 읊으며 박목월 시인과 그 부인에 얽힌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울릉도 만덕호 사건으로 이야기는 이어졌다. 밤은 깊어가고 별은 빛나는데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락날락했다.

날이 밝아지자 이제 또다시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란가르에서 무려 1천m가 높아지는 자티 쿰베즈(Jarty Gumbez)로 8 시간 차만 타는 일정이다. 가는 길에 낭떠러지도 많다. 긴장되는 하루다.

까마득하게 강이 보이며 급경사의 위험한 구역을 달렸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60대 친구들에게 권유할 만한 코스로 생각했으나 여기서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4천여m 고지대에서 채 대장은 잠시 차를 세웠다. 그는 아득한 아래 계곡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전쟁 중 타지키스탄과 러시아군 젊은이들이 탄 차가 굴러 많이 죽은 곳으로 바이 메모리얼 홀(bye memorial hole)입니다."

젊은 꽃다운 생명이 피기도 전에 전쟁이라는 이름 속에 절벽 아래로 굴러 생을 마감했다는 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멈추지 않고 젊은이들이 부여받은 삶을 희생시키는 비극을 반복하는데….

호텔에서 정전이 예고없이 찾아와 헤드랜턴을 켜고 일기장을 써 내려갔다.
호텔에서 정전이 예고없이 찾아와 헤드랜턴을 켜고 일기장을 써 내려갔다.

어떤 명분으로도, 어떤 이유로도 전쟁을 정당하게 만들 논리는 없다. 정치 연장선이 전쟁이라면 그 전쟁 책임자는 정치인, 국정 책임자들이다. 까닭 없이 죽어간 그들의 희생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저 명복을 빌 뿐이다.

장시간 운행한 끝에 도착한 4천200m 고지 자티 쿰베즈에서도 온천이 가능했다. 움직이기조차 숨이 가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지만 온천에 몸을 던졌다.

이날은 요르츠(몽골의 게르 같은 천막집)에 가서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한국은 8월 초 불볕더위, 열대야라고 하는데 첨으로 이곳 고산에서 서늘함을 넘어 추위를 느꼈다. 가져간 슬리핑백 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험준한 산맥, 톈산산맥과 히말라야, 힌두쿠시, 카라코람과 연결하는 파미르고원, 실크로드 상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고원지대 한복판에서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고지대에서는 호흡도 문제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아 괴로웠다. 일부는 수면제에 의지해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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