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는 한자성어 무호동중 이작호(無虎洞中 狸作虎). 요즘에는 호랑이와 함께 왕 노릇을 하는 여우도 있어 유호동중 이작호(有虎洞中 狸作虎)로 바꿔도 무방할 듯싶다. 꾀 많은 여우가 들으면 억울할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원성이 맞지 싶다. 물론 자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지 몰라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나온다.

왕 노릇을 하는 여우도 문제겠지만 더 큰 문제는 주변에 있는 힘없는 부하들이 호랑이 눈치를 보느라고 여우의 횡포를 함구한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점은 그 중 아부 잘하는 부하들이 여우가 하는 일은 무조건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호랑이 귀를 가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호랑이 스스로 여우를 너무 믿는 듯싶어 해결 방법이 전혀 없어 보여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다.

권모술수를 부리는 사람을 비유할 때 여우라는 말을 쓴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텐데. 별안간 요즘 울지도 않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귀에 아련하게 들린다. 뻐꾸기는 늘 혼자서 우는데, 마치 고독한 단독자처럼 구슬프게 운다. 이 산, 저 산 뻐꾸기들이 서로 화답하듯 주고받기도 한다는데, 왠지 호랑이가 없는 굴의 토끼가 자꾸 생각나는 까닭은 뭘까.

뻐꾸기는 ‘얌체’, ‘깡패’, ‘사기꾼’ 들 주로 남의 물건을 탐하는 나쁜 뜻으로 많이 쓴다. 한마디로 ‘나쁜 놈’이라는 얘기다. 뻐꾸기는 탁란(托卵) 습성 때문에 자기 둥지가 아닌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다.

대다수 새가 둥지를 틀어 새끼를 기르는 일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데 견줘 뻐꾸기는 개개비나 붉은머리오목눈이 같은 순진한 새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 얌체 짓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원래 주인인 새가 낳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 아래로 떨어뜨려 버린다. 제 새끼를 모두 죽인 줄도 모르는 가짜 어미 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저보다도 더 큰 뻐꾸기 새끼를 정성껏 돌본다. 그리고 마침내 다 큰 뻐꾸기는 그동안 자신이 성장했던 둥지에 대한 미련도, 키워 준 어미에 대한 고마움도 잊은 채 훌쩍 떠나 버린다.

여우도 아니고 뻐꾸기도 아니라고 손사래 치겠지만,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는다면 그 몸짓은 모두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미처 탁란을 눈치채지 못한 붉은머리오목눈이에게는 남의 새끼 배를 불려 준 사실밖에 남지 않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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