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 9월 14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중소기업중앙회 회관에서 개원 35주년 기념세미나를 개최했다. ‘다양성의 도전과 근로환경 개선 과제’라는 주제 아래 3가지 세부 주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노동시장 변화와 다양성의 도전’이란 첫 번째 기조발표(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장)에서는 ‘도전’의 세부 내용을 경제활동인구의 구성 측면(여성과 고연령자의 경제활동 급증, 체류 외국인 급증 등), 기술 측면(인터넷, 생성형 인공지능 등), 가치관 측면(K-문화, 공정성 기준 등)으로 구분해 소개했고, 그 대책으로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경력단절적 육아휴직보다 육아기 등 돌봄수요 발생 시 시간 사용 유연성을 부여하는 규범과 관행 확대, 고연령층 통계 세분화, 정년·사회보험 가입과 수혜 연령 조정, 고연령자를 감안한 산업안전보건 확대 등).

‘국제비교를 통한 우리나라의 근로환경 현황:한·EU 근로환경조사 결과를 중심으로’라는 두 번째 발표(박종식·오진욱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발표)에서는 한국, EU 27개국, 영국, 노르웨이의 근로환경에 대한 비교·분석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우수한 부문은 통근시간, 업무 강도, 물리적 위험, 인체공학적 위험, 정서적 위험, 건강과 웰빙, 일·생활 균형, 자녀 돌봄 부문이었고, 취약한 부문은 근로시간, 교육훈련, 직무자율성, 근로자 대표 기구, 근로자 참여, 사회적 환경, 직무 열의, 경력과 고용 안정, 노인 돌봄 부문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객관적 지표를 참작하지 않고 주관적 설문조사에 의존한 비교·분석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크지 않다는 토론자의 비판이 제기됐다.

다음으로 ‘근로환경의 개념과 정책 방향:일하고 싶은 일터를 위한 근로환경 조성의 정책과제’라는 세 번째 발표(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발표)에서는 1980년대 초반부터 ILO의 산업안전보건 논의를 중심으로 ‘근로환경’이란 개념이 활용됐다는 점, ‘근로환경’을 정의하는 국제문서는 없지만 대체로 ‘안전하고 건강한 근로환경(safe and healthy working environment)’으로 표현된다는 점이 소개됐다. 특히 2022년 ILO에서 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전통적인 ‘산업보건’ 외에 ‘정신적 건강’, ‘인적(관계적) 건강’까지 포괄하는 넓은 범주로 활용된다는 점도 소개됐다. 

그런데 토론에서는 ‘근로조건’이란 개념과 ‘근로환경’이란 개념을 규범적으로 구별해야 할 실익이 있는지와 구별 방법 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즉, 두 개념을 규범적으로 구별할 실익에 대해 회의적 견해(‘근로환경’을 이념적 개념으로, ‘근로조건’을 규범적 개념으로 이해하자는 견해)도 개진됐고, ‘근로환경’에 관해 실효성 있는 제도적 장치를 어디까지 마련할지 불분명하다는 점도 지적됐다. 

다른 한편에서는 ‘근로환경’에 관한 논의를 비단 ‘근로관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넓게 ‘모든 일하는 사람들(자영업자 등도 포함)’에게 적용해야 할 개념으로 승화시켜 논의할 필요도 있다고 하는 전향적 견해도 개진됐다. 생각건대, 추상적인 ‘근로환경’의 개념을 앞으로 법적 개념으로 도입해 입법화하는 데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여겨진다.

한편, 이날 세미나 개회 시 소개된 영상축사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노동 이슈들을 언급하며 ‘노사법치주의 확립’을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사법치주의’란 용어는 지난해 말 화물연대 파업 때 처음 등장한 이후 자주 사용되는데, 이 개념은 노동법 영역에서 매우 생경하다. 

우리 헌법과 노동법 규정과 취지를 들여다보면, 노사관계의 기본은 ‘노사자치주의’에서 찾는 것이 옳다. 노사 문제는 우선 노사 당사자들 간에 자치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고, 정부는 노사자치로 해결되기 어려운 경우 ‘법치’로써 개입하는 편이 타당하다. 정부가 ‘노사법치주의’라는 명분으로 공권력으로써 노사관계에 선제 개입하면 ‘노사자치주의’가 실현될 여지는 크게 위축·소멸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는 ‘노사법치주의 확립’을 강조하기보다 ‘노사자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조력하는 것이 근로환경 개선에 더욱 도움이 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