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납 신(申)자의 신으로 표기하는 지명으로는 강화도 신성동, 충남 해미 신기리, 강원도 신석리, 경북 안동 신석리, 경북 경산 신석리, 상주 신곡리, 평남 순천 신평동이 있다.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들어온 시기는 조선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백제·고려·조선에서도 원숭이와 관련된 지명·능묘·건축물·도자기·공예품을 볼 수 있다. 

개성 개풍군 만수산에 고려태조 왕건의 현릉이 있다. 능묘 주위 12각형 호석 각면엔 12지상 원숭이가 있다. 

경북 영주 봉황산에 자리한 고려시대 건축물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건물은 기둥 두공 부분에 원숭이 한 쌍이 처마를 받친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 건축물 문묘 기둥의 두공에서도 원숭이가 있다.

고려 학자 이인로의 지리산 청학동 시와 조선 학자 유방선의 지리산 시에서도 원숭이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원숭이가 서식했음을 추정해 본다.

중국 송나라 사람들과 일본인들이 갖고 싶어 했던 고려 청자와 공예품에서도 원숭이 그림들이 많이 나온다. 

원숭이를 중국에서는 별칭으로 저후·군탄·예한으로 불렀다. 천운감에서는 광연·연·유·노·미후·왕손은 원숭이를 지칭한다고 했다. 원숭이 나이가 천 살이 되면 늙은 사람으로 변신한다고 포박자는 말했다. 범어에서는 원숭이를 마사타로 부른다.

원숭이가 일본에서 왔다는 자료를 보면 1396년 6월 일본 사신이 오면서 원숭이 한 쌍을 선물로 가져온다. 일본 족리 막부시대에서도 원숭이를 보내온다. 제주 한라산에 방목했다.

1462년 일본 천태종 본산인 유교사에 큰 불이 난 후 재건할 때 조선의 도움을 받고 감사의 표시로 원숭이를 보낸다.

조선 성종 임금은 원숭이 그림을 좋아해 도화사 화원에게 원숭이의 실물 묘사를 장려했다고 한다. 일제 초기까지 지금의 미추홀구 관내 해안가에 원숭이(猿島)라고 불리는 작은 섬이 있었다. 원도에서는 인천 바다에 있는 섬의 신들을 모시는 제례가 있었다. 신과 사람은 서로 감응한다는 우리 전통 사상으로 국운 번성과 민중들의 복록을 기원했던 제례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제례 행사를 최고 생활의식으로 여겼다. 국가적·사회적·가정적 생활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이 제례라 믿고 실행했다. 모든 일을 제례로 다스린다고까지 말했다. 천지 산천으로 제례를 올렸던 우리 전통풍속이다. 임금이 직접 제단을 찾아 제례를 올렸다. 신들을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제례로 신들에게 예를 표했던 것이다. 유교적·불교적 제례가 그러한 뜻을 가졌다.

고려의 용왕도장·신중도장·수륙도장의 제례 의식도 미추홀구 문학산에서 열리는 원도 제례의식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봄과 가을에 열렸던 원도 제례 의식은 수령이 제주였다는 사실로 보아 관 주도로 열린 제례다. 미추홀구에서 원도 제례를 복원해 매년 봄 연다는 소식이 들린다. 끊겼던 민속문화를 발굴해 복원하는 노력에 응원을 보낸다. 시민들에게 제례 일시를 미리 알려 함께하는 전통 제례행사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동구 만석동에서도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보이는 자그마한 용왕제 사당이 일제 초기까지 있었다. 민중 주도로 열렸던 제례였다. 복원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원도는 원숭이가 서식해서 붙인 지명이 아니다. 백제에서는 해안선이 굴곡지거나 바닷물이 굽이쳐 흐르는 굴곡된 지점에 있는 해안가 지역에 원산·원촌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도 원숭이산·원숭이마을이라는 지명 5곳이 문헌에 나온다. 미추홀구 관내에 있었던 원도는 백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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