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교사는 과거 인식의 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교육은 태초부터 가족에서 공동체로 확산되면서 생존의 수단이었고, 인류 문명 보존을 위한 일차적 성격을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시대의 교사라 할지라도 과거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개혁적으로 ‘주도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즉, 자위권을 발동시켜야 한다.

여기엔 ‘이왕 하는 거, 현재를 즐기자’는 이른바 ‘카르페디엠’ 사고가 필요하다. 이를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학생을 위하기보다 교사 자신을 위하여’라는 의식이 그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손톱에 가시가 박히고 이가 시리고 머리가 아프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기 전에 시급히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는가. 지금 이 시대, 이 땅의 교사들의 상황이 그렇다. 한 달 반 동안 6명의 극단적 선택이 베르테르 효과처럼 번진다. ‘행복 추구’는 사치스럽게 느낄 정도로 도처에서 ‘생존권 확립’이 더 우선이다.

이제 교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교육활동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도록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덩달아 눈앞에 있는 학생들 역시 그 기운이 전파돼 행복할 것이다. ‘학생을 위하여’라는 자세에는 보통 희생이 따르고 심리적 부담이 이어진다. 하지만 ‘교사를 위하여’라는 태도에는 희생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라는 마음이 앞선다. 결국 교사 자신을 위해 꾸미고, 즐기고, 베풀면 간섭과 통제가 있을 리 없으니 지금보다는 더 행복할 것이다.

학교는 매일 비슷한 업무와 일상적 행동이 무한 반복된다. 그렇다고 어제 같은 오늘이 싫다고 그 활동을 다른 누구에게 미루거나 대체할 수는 없다. 바로 교사 스스로 구하고, 두드리고, 열어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 본받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교사의 교육활동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교사 스스로 주체가 돼 행복, 나아가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즉, 강력한 자위권 발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컨대 학교로의 출근길이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느끼고 싶다면 학교에 연인을 두는 것도 스스로 노력할 바다. 어떻게 말인가? 바로 학생을 교육하는 내용을 연인으로 삼으면 된다. 가르치는 내용과 행위가 마치 연인과의 데이트를 즐기듯 하면 스스로 행복 추구, 나아가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교사가 진정으로 한 시간 수업이 즐겁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투자는 필수다. 마치 좋은 재료만으로 좋은 음식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듯, 좋은 자료를 구하고 그 자료로 입맛 돌도록 전문가답게 솜씨를 발휘하면 한 시간 수업이 보람차지 않겠는가. 솜씨 부족하다고 고백하며 매번 이해를 구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럴 바엔 차라리 교육이라는 식탁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

현실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열 번, 백 번 인정한다. 그렇다고 억제와 타율을 이끄는 교육당국이 하라는 대로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교권 회복, 교권 보호를 외치며 나서도 교육당국이나 입법부는 결코 교사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교육은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국가가 함께 가야 할 공동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각자 자기 주장을 철저하게 고수하며 유리하게 나서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 ‘풍선 효과’만으로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최근 교사들에게는 죽음의 망령이 도처에서 맴돈다. 역사상 유례없는 교사 ‘상처 시대’이자 ‘위기 시대’다. 이에 교사 스스로 당당한 철학자가 되고 경영자가 돼야 한다. 학부모 악성 민원과 아동학대 신고, 폭주하는 업무에 대해 연대와 공조를 하되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 일차적이다. 그러나 그 기본에는 정당한 자위권 발동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금 이 시대 교사의 정체성에 자기 질문을 보탬으로써 난국을 극복하는 슬기로운 교사생활이 필요한 때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