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다 젯밥. 명절이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지금은 간판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식당에서 차려 준 밥상이 떠오른다.

추석을 한 달여 앞두고 첫 직장에 다녔다. 방송국에 납품하는 외주 다큐멘터리 제작사였다. 직무는 조연출. 연출 바로 밑이니 고급 인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최저 시급도 안 되는 월급에 촬영장비나 돈 관리는 기본이고 잡심부름과 청소까지 도맡았다.

출근은 첫차, 퇴근은 막차를 탔다. 그 시간이면 대중교통 빈자리가 넉넉하다는 점이 큰 위로였다.

출연진만 십수 명, 제작진까지 합하면 스무 명은 가뿐히 넘었다. 혼자서 이들 편의를 살펴야 했다. 그 중에서도 날마다 밥 먹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가격대가 높지 않으면서 걸어갈 만하고, 다함께 먹을 넓은 곳을 찾아야 했다. 하필 촬영 장소는 카페와 디저트 가게가 즐비하기로 유명한 동네였다.

그 틈에서 어느 고깃집을 찾았다. 점심 때 잠깐 백반을 팔아 낮이면 근처 직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전화하니 예약은 안 받는단다. 식당을 찾아가 "촬영 끝나기 직전에 연락할 테니 자리 좀 만들어 달라"고 무턱대고 부탁했다.

그렇게 한 달 들락날락하면서 어느새 식당 아주머니들과 친해졌다.

연휴 전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촬영이 끝날 즈음 식당에 연락하려는데 웬걸, PD가 오늘은 다른 곳 가서 먹잔다. 명절이라고.

그 말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왠지 식당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준비했을 듯싶었다. 뒷정리를 하겠다며 사람들을 보내고 혼자 백반을 먹으러 갔다. 아주머니들이 "이제 오냐"고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하는 얼굴 뒤로 평소보다 수북하게 쌓은 반찬이 보였다. 오늘은 직장인들도 별로 안 올 텐데, 의아한 표정을 읽었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말했다. 우리가 올 줄 알고 반찬을 많이 만들었단다. 명절이니까.

다큐멘터리 조연출로 일한 까닭은 마음 기록하기를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정작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은 왜 촬영장 밖에서 불쑥 발견하게 될까.

무력감과 고단함이 뒤엉켜선지 갑자기 배가 고팠다. 그렇게 전과 잡채가 푸짐하게 차려진 명절 밥상을 받았다.

추석 잘 보내시라 쭈뼛거리며 인사를 드리고 식당을 나섰다. 얼마 뒤 촬영 장소가 바뀌었고 그 식당에 가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 집은 명절 음식을 내놓을까. 배가 불렀는지 마음이 더 불렀는지 모를 그 밥상이 생각난다.

제보다 젯밥. 추석이니까 한술 더 떠 본다. 젯밥보다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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