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옆에서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
차량 옆에서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

파미르고원을 떠나기 전, 권 선생이 일행을 위해 맥주 50병을 선사하겠다고 나섰다. 그 다음 날은 방송사 유명 작가 출신 김 선생의 보드카 접대도 예약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어디서나 ‘술 권하는 사회’가 전통이다.

이들은 모두 낯선 여행객, 잠시 인연을 함께하는 사이에 지나지 않지만 기꺼이 주머니를 터는 멋진 사나이들이다. 이런 자리에서 이번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가 자연스레 나오는 법이다. 공식으로 떠나기 전날 칼라이 쿰부 조로아스터교 유적지를 찾은 날, 바람도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모두 둘러앉아 나눈 대화를 종합했다.

처음 말문을 연 50대 백 선생은 "99% 만족한다"고 했다. 부부팀 전 선생은 "평생 잊지 못할 투어였다. 게다가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70대 박 교장은 "여행도 트레킹도 좋아한다. 여기 오니까 모두가 고수다. 많이 배웠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렇지만 퍽 좋았다"고 했다.

대전 출신 고 선생은 "타지키스탄에 애정이 생긴다. 10여 일 함께 먹고 자고 하기 힘들다. 가족 말고는…. 혹시라도 함께하는 시간 동안 제가 사진 찍는다고 눈이 멀어 맘 불편한 사항이 있었다면 이해해 주기 바란다"는 사과 멘트를 잊지 않았다.

주유소가 없는 파미르에선 차 지붕의 기름통을 내려 중간 급유를 한다.
주유소가 없는 파미르에선 차 지붕의 기름통을 내려 중간 급유를 한다.

조 원장은 "나는 5년마다 자신에게 시간의 선물을 주자는 차원에서 이렇게 다닌다. 아프리카를 가려다 이곳이 정말 좋아 선택했다. 관광은 일정을 마치면 그대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고, 여행은 갔다 오면서 지금까지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돼 돌아가는 일이라고 여기는데 이번에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는 달라졌다고 믿는다. 좋은 여행이었다."

서울 한 방송사 현역인 이 피디는 "저는 세상을 꼼꼼하게 사는 주의자가 아니고 되는 대로 살자는 생각이지만, 와서 보니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느낀다. 고수가 많아 미미한 존재임을 확인했다. 더구나 광활한 자연 속에 다시 한번 미약한 존재임을 확인했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옆을 이동 중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옆을 이동 중이다.

여행이 생활인 김 선생은 "주로 혼자 여행을 다녔는데, 중앙아시아는 치안 문제로 그룹투어를 신청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해서 묵는 곳이 불편해도 괜찮다. 바르탕 계곡 2∼3일이 유달리 좋았다. 혼자서는 가지 못하는 곳이다. 여러 좋은 사람을 알게 돼서 정말 좋고 뜻깊었다. 만족스럽다"고 정리했다.

건축디자이너 출신 서 선생은 "여행이라고 와서 보면 못한 부분이 많다. 집사람과 함께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행동을 순화하려고 노력한다. 사진도 여행도 지켜야 할 선이 있듯이 잘 지키는 편이 좋다. 이번 여행도 많이 배우고 간다"고 했다.

서 선생 부인 조 씨는 "남편을 따라다니다 트레킹 여행을 알게 됐다. 앞으로도 계속 따라다닐 생각이다. 여러분도 많이 다니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다음은 내가 평가할 차례다. 파미르는 말 없이 홀로 우뚝 솟았는데, 찾는 이에게 나름의 성찰할 기회를 주는 듯싶다. 난생처음 파미르를 다녀오면서 나는 파미르 전과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 찬찬히 정리했다. 앞으로 이를 잘 실천할지 여부는 모두 나에게 달렸다. 10가지로 정리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다.

1. 운동을 더욱 철저하게 하라.

나는 파미르 트레킹을 예약한 뒤 그냥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평소 테니스 운동 말고 두 가지를 추가했다. 낮시간에 한 시간 정도 집 앞 장아산이나 인천대공원 산행을 생활처럼 했다. 기초체력을 다지려고.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 훈련도 파미르 가기 전 반드시 하는 몸 만들기 작업의 하나였다. 파미르는 평소에도 그렇게 계속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2. 덧없는 인생,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람 있게 살아라.

눈부시도록 파란 파미르 하늘 아래 덧없이 모였다 흩어지는 먼지처럼 덧없이 가는 인생이지만, 사는 동안은 그래도 즐겁게 살고 가능하다면 보람 있게 살라는 얘기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바로 고향 울릉도에 가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버스킹을 하면서 장학금을 마련했다.

3. 다음 여행을 준비하라.

여행이 생활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못하더라도 정기 오지여행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맞는 신뢰할 만한 여행사가 최고다. 나는 여행사 일정을 보고 내 인생 스케줄에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미리 시간을 빼 두기로 했다. 나에게 앞으로 많은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 나 홀로 여행을 두려워 말라.

나는 그동안 혼자 여행하기를 망설였다. 그런데 이번 파미르 여행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남녀 모두 혼자 하는 여행객이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기에 두려움 없이 나서라고 조언하고 싶다. 좋은 여행사(티엔씨)를 만나는 일도 인생의 새로운 낙이다. 혼자 여행에 나서면 선택지가 넓어지고 스케줄 조정도 쉬워진다. 여행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를 잠시 동안 부담없이 만나서 좋다. 그 여행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는 데 홀로 여행도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5. 겸손과 배려를 배우는 훈련장이다.

파미르 여행에서 70대 선배 권기범·박두식 선생은 항상 후배를 먼저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필요하면 식사 때 술도 서비스하는가 하면 생활과 마음의 여유는 후배들한테 아낌없는 박수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권 선배는 파미르를 여행한 뒤 해단식도 따로 준비하고, 가을 단풍 고울 때 고향 문경 트레킹도 제의할 정도로 적극 나서 인기 만점이었다. 권 선배가 가장 아끼는 김 작가도 곧잘 후배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모습을 보였다. 나이 드는 법을 이만큼 솔선수범해 가르치기도 힘들 테다.

6. 프로정신을 가져라.

티엔씨 여행사 채 대표를 보면서 그의 프로정신을 생각하게 됐다. 여행사 대표의 프로정신이라면 여행객들을 위한 최대 서비스 정신이다. 밥을 먹을 때나 이동할 때나 자신이 손수 준비한 한국 음식, 양념, 의약품으로 일일이 구성원을 챙겼다. 비상약도 잘 챙겨 구성원들이 요구하는 바는 빠짐없이 제공했다. 그래서 일정에 조금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 신뢰 관계가 있어 조금의 불평이나 불만도 없이 기분 좋게 다녔다.

7.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 주체가 돼 살아라.

진정한 고수는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잘 엮어 가는 사람이다. 울산 신철인, 새를 좋아해 전 세계 새를 찾아다니는 박 선생, 70대에도 파미르를 오르는 권·박 선배…. 게다가 험난한 오지에 함께 가 뜨거운 부부애를 과시한 몇몇 커플은 박수를 받을 정도였다. 누가 뭐래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주위를 살피는 모습은 본받을 만하지 않은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떠올렸다.

8. 귀한 시간을 귀하게 쓰라.

파미르를 처음 소개한 조남억 치과의사는 5년에 한 번 정도 자신에게 10일 이상의 장기 휴가를 주는 식으로 시간을 쪼개 사용한다. 그는 하루 24시간도 그렇게 쪼개고 또 쪼개 만날 사람 만나고 할 일을 찾아가며 하는 성실파 전형이다. 그렇게 시간을 아끼는 사람은 훗날 인생 후반전이 되면 반드시 시간의 보상을 받는 법이다. 대신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는 자는 언젠가는 시간한테 보복을 당하게 된다. 후배에게도 배울 점은 배우는 일이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가르침이다.

9. 자신감을 갖고 살아라.

파미르는 대자연 속에 인간 존재의 하찮음, 인생의 덧없음을 알려 주지만 그렇다고 인생의 소중함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60대 이후 남성은 더욱 약해지고 사회에서나 신체로나 약자가 되지만 그럴수록 주눅 들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의 지위와 명함은 중요하지 않다. 나라는 생명, 인간이 소중한 만큼 먼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존중하고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10.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라.

배우자나 자녀, 가족에게 늘 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가까운 이들이 남아 돕는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이들에게 보험 들듯 잘하라는 얘기다. 물질이나 마음, 말로 얼마든지 베풀면 된다. 그래야 내가 좋고 여행도 즐겁게 다니게 된다. 떨어져 봐야, 고달파 봐야 집의 편안함과 배우자가 해 주는 정성 담긴 음식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법이다.

트레킹 중 마주친 탁 트인 하늘.
트레킹 중 마주친 탁 트인 하늘.

말로만 듣던 파미르 하이웨이 트레킹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파미르의 험난한 길은 인생의 길이 그렇다고 알려 주는 듯했다. 가끔씩 고산지대 그늘에서 향기롭게 날아오던 시원한 바람은 그래도 아름다운 인생, 살아갈 만한 멋진 세상임을 확인하도록 했다.

해발 3천∼4천m에서 느꼈던 호흡 곤란과 일시 두통 증세는 인간의 나약함을 확인시켜 세상에 좀 더 겸손해지도록 만들었다. 일행 모두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16박 17일을 무사히 마쳤으니 인생의 축복이었다.

생애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파미르고원 트레킹은 나에게 인생에서 멋지게 하산하는 법을 가르쳤다. 역시 최고 교육은 일부러라도 역경을 체험하게 하는 일이라고…. 파미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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