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최근 모처럼 세 시간짜리 영화 ‘오펜하이머’(2023)를 감동적으로 봤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영화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천재 과학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핵무기 개발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 당시 과학자의 고뇌와 시련에 집중한다. ‘나치보다 앞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개발에 몰두,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결국 자신이 인류를 파멸시킬 무기를 발명했다는 사실에 깊은 고뇌를 한다.

영화 스토리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처음에 핵무기 개발과 사용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의 동료 과학자 닐스 보어가 "인류는 핵무기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지 않고, 오펜하이머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개발을 반대했던 점과 비교가 된다. 중요한 건 오펜하이머가 자신이 개발한 핵무기가 어떻게 사용됐는지, 또 얼마나 큰 피해를 유발했는지 확인한 후 비로소 핵무기 반대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울림은 핵무기 개발로 "이제 인류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시작됐다"는 멘트였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과학’과 ‘정치’가 만났을 때 어떻게 갈등을 해결하는지에 시사점을 얻는다. 영화에서는 과학자 오펜하이머와 대통령 트루먼이 독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펜하이머가 "제 손에 피가 묻은 듯합니다"라고 말하며 핵무기 사용에 양심적인 고백을 할 때, 트루먼은 분노하고 비웃으며 그가 징징댄다고 욕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누가 무기를 개발했는가보다 누가 무기 사용을 결정했는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며 아주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게 미치는, 바로 ‘과학’과 ‘정치’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에 따라 그동안 적재된 오염수 방류로 국제사회가 크게 동요했다. 당사자인 일본 어민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방류 반대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가장 인근 국가인 대한민국은 과학적인 핵오염수 처리에 문제가 없다고 공식 견해를 발표, 사실상 핵오염수 방류에 찬성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국제환경운동단체인 그린피스에 의해 핵오염수 방류의 방조자라는 거친 비난과 성토를 당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자세를 취한다. ‘과학’의 언어를 빌려 오염수를 정화 장치로 잘 걸러내며, 방사능은 기준치 이하여서 안전하다고 강변하며 홍보용 동영상까지 제작해 국내에 소개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 그 이상의 행태다. 물론 검증 안 된 방류는 반대한다는 극히 상식적인 견해를 냈지만 사실상 ‘과학’적인 방류에 찬성했다. 하지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반핵의사회,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 그리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방사능 오염수가 30년 넘게 바다로 흘러가면 해양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기준치 이하여도 생물 농축과 축적이 일어나 농도가 높아진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과학’을 신뢰해야 할까? 또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은 어디까지가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건가? 헷갈리기만 하다. 분명 과학은 만능이 아니다. 그 한계를 인식하고 면밀히 검토해서 위험성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게 과학의 원칙이다. 그리고 정치는 과학이 원칙을 지키게끔 지원하고 협조해야 하는 본래 역할과 책임이 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지금 우리에게 이 시대에 필요한 과학이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되도록 만드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원칙에서 벗어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상하게 해결하려는 의도적인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과학’과 ‘정치’가 만났을 때 분명 인류 문명에 기여하는 쪽으로 결단을 하고 협력과 연대를 해야 하는 강력한 실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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