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인천은 1883년 제물포 개항으로 다양한 서구 근대 문물의 출입 통로가 됐다. 140년 전 그 역사적 자취들이 모티브가 돼 오늘날 중구 개항장의 주요 콘텐츠가 구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관광지 구실을 한다. 그런 까닭에 일제강점기 이전, 특히 개항 후 20여 년 동안의 조선은 물론 청국, 일본, 서구 각국인들이 생활했던 터전으로서 국제도시 개항장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주제 중 하나다.

그런 관점에서 각국거류지였던 송학동 3가 일대는 1910~1911년 진행된 토지조사부를 보면 획정된 7개 지번이 다양한 역사적 이력을 남긴다. 송학동 3가 맨 위쪽에 위치한 1~2번지는 현재 주택들로 이뤄졌지만, 당시는 그 일대가 응봉산 자락이라 1번지는 획정되지 않았고 2번지는 일본인 소유였다.

1~2번지와 송학로를 사이에 두고 아래에 위치한 3번지는 인천부 소유로 기재됐는데, 이 일대는 개항 후 각국거류지 외국인들의 자치의회 격이었던 신동공사(紳董公司)와 각국거류지경찰서가 있었고, 1920~1930년대는 인천공회당과 인천상업회의소(인천상공회의소로 변경)가 자리했다. 1957년에는 시민관이 운영했으며, 현재는 인성여고 체육관과 공영주차장이 자리한다. 3번지와 이웃한 4번지 일대도 현재는 다양한 주택들이 자리하지만 당시는 영국 성공회 부지로 원래 내동성교회성당이 자리했던 공간이다. 내동 옛 감리서 터 위쪽에 위치했던 성공회 선교의사 랜디스의 병원 자리로 옮겨 가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

신포로 47번길을 두고 아래에 위치한 세 번째 블록에는 5번지와 6번지가 맞물렸다. 타운센드가 소유했던 5번지는 흔히 담손이방앗간으로 불렸던 최초 증기력을 응용한 타운센드정미소와 1905~1906년 제8대 인천해관장을 지내고 1918년 타운센드양행을 인수해 운영했던 영국인 맥코넬의 저택이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이당(以堂) 김은호 기념관이 있던 공간이다. 현재 5번지 일대에는 중부교회와 교육관, 초연다구박물관, 다세대주택이 자리한다. 

6번지는 독일 세창양행 칼발트의 소유지였다. 이 공간은 애초 일본영사관 구내에 뒀던 경찰서가 협소해지자 1923년 벽돌건물을 신축하고 옮겨 왔던 곳이다. 광복 후 인천경찰서로 사용하다가 1978년 항동, 지금의 하버파크 호텔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현재는 화물운송업체와 다세대주택이 자리한다.  

총 4개 블록으로 구성된 송학동 3가 부지 중 신포로 39번길 아래에 위치한 마지막 블록인 7번지 일대는 모두 타운센드 소유로 비교적 넓고 긴 면적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조선인과 중국인이 혼거(混居)하던 내동과 신포시장 경계에 자리하면서 인천항과도 가까워 물품 수송에도 편리했던 위치다. 이 지점에 타운센드상회 인천지점이 자리했고, 타운센드상회 지배인을 지냈던 장기빈의 주택도 있었다. 현재 그 일대는 볼링장, 돈가스 가게와 초밥집, 다세대주택과 고시원 등이 자리한다.

이렇게 각국거류지였던 송학동 3가 일대는 개항 후 영국·미국·독일이 소유한 땅들이 대다수였고, 특히 5번지와 7번지 넓은 공간은 1884년 인천항에 진출했던 미국의 타운센드상회 소유였다. 또 100여 년 전 인천해관장을 역임하고 타운센드상회를 인수해 운영했던 영국인 맥코넬 그리고 인천해관 방판(幇辦)으로 근무하다 1918년 타운센드상회 지배인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세관장을 역임했던 장기빈(張箕彬)이 비슷한 시기에 타운센드상회와 해관에서 함께 활동했음도 발견한다.

특히 장기빈은 부통령과 내각수반을 지낸 장면(張勉), 서울 미대를 창설한 장발(張勃), 항공학의 세계적 권위자 장극(張剋) 3남을 뒀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초대 원장을 지낸 수녀 장정온(張貞溫) 등 4녀가 있었다. 이들과 관련한 이야기는 또 다른 중요한 개항장의 이력이다.

그런 뜻에서 원도심 재생사업의 시작은 새로운 토건사업 이전에 역사 흔적을 찾아 그 이력(履歷)을 새겨 넣은 이름표를 붙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곧 제물포 르네상스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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