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철 의왕시 문화예술정책관
안종철 의왕시 문화예술정책관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2024년 주목할 트렌드를 ‘분초사회’라고 말한다. 분초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은 일상생활의 시간을 철저하게 조각내서 모듈(module)화시킨다. 이는 남는 시간을 자신만의 시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2024년은 경제 패러다임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확실하게 넘어가면서 ‘시간은 곧 돈’인 사회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분초사회는 플랫폼 사회로 접어들면서 시간을 밀도 있게 쓰게 된 현대인이 더욱 시간의 가성비를 강조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로, 시성비(시간+가성비)라고도 한다. 일을 많이 해서 남은 여가 시간이 적어지는 반면 세상에 즐길거리가 많아지다 보니까 여가시간을 가성비적으로, 압축적으로 1분 1초도 남김없이 써야겠다는 행동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일 오후 6시 32분에 만나자"고 이야기를 한다. 정시, 30분 단위가 아닌 분 단위로 약속 시간을 정하는 것은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연차 휴가’ 대신 ‘반반차 휴가’를 쓰는 MZ 직장인도 늘었다. 반반차 휴가는 연차를 반의 반으로 나눈 2시간 단위 휴가인데 병원 진료, 은행 일, 베이글 맛집 웨이팅 등 하루를 투자하기는 아깝지만 시간을 꼭 써야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분초사회는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이미 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때 빨리 감기를 해 시청하는 ‘배속 시청’과 영화나 드라마를 결말을 포함한 요약본을 보는 일이 다반사가 됐고, 틱톡과 유튜브 등에서 평균 1분 내외 ‘숏폼(Short-Form)’ 콘텐츠가 대세로 자리매김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낭비되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보니 ‘실패 없는 쇼핑’도 떠오르는 트렌드다. 실패한 쇼핑은 곧 돈과 시간을 한꺼번에 버리는 일이니 결국 믿고 사는 쇼핑몰은 그 자체로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소비시장에서 대체할 수 없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인플루언서 혹은 브랜드가 제시한 것을 그냥 따라서 하면 된다.

왜 이렇게 시간은 소중해졌을까. 단지 바빠져서가 아니다. 소유경제에서 경험경제로 경제 패러다임이 넘어가면서 시간이 돈만큼이나 중요한 자원이 됐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비싼 소유물을 과시하는 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여행지, 맛집, 핫플레이스 인증샷으로 자랑하는 시대다. 모두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면 단 1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모아야 여유의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부가 양극화되는 시대에 유일하게 누구에게나 공평한 건 시간이다.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가장 평등하고 소중한 자원이고, 그것을 아껴 쓰고 시간의 가성비를 추구하는 일은 어찌 보면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초사회’가 효율을 따진다는 뜻이지, 각박하게 산다는 건 아니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각박해지고 차가워지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으나, 그보다는 효율을 추구하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현대인들의 큰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좋겠다. 잠깐의 틈이나 여백이 없다면 언제 삶을 돌아보겠는가. 

성찰과 사색 없이 주어진 자극에 반사적 반응만 있는 삶.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없고 입력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 서사의 위기에서 한병철이 말한 서사 없는 ‘텅 빈 삶’이 도래하지 않을까. 

버드란트 러셀은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기존 8시간 일하던 것을 4시간만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존에 여가와 사치를 즐기는 계급이 과학과 문화예술을 발전시켰듯이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저마다 탐구와 창작을 하고 다채로운 문화를 싹틔울 것이라고 봤다. 오늘은 분초를 쪼개 남은 시간으로 미술관을 둘러보고 차 한잔의 여유를 느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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