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12월, 올 마지막 달인데도 아마릴리스 꽃은 피어 있다. 일경다화인 이 꽃은 이제 한 줄기만 남아 다섯 송이에서 두 송이로 여태 그 청초한 자태를 지킨다.

참으로 가상하다. 말을 하지 않을 뿐 인간과의 순정한 교류이기에 그렇다. 예년 같으면 이제 질 만도 한데 온난화 탓인지 아직 피어 있다. 오히려 신장년기에 들어선 혼족 인생을 위무하는 대자연의 한 몸짓이 아닌가 싶다.

그 뿐만 아니다. 몇 년 전 들여온 분재 동백꽃은 뾰조롬히 내밀던 두 꽃봉오리들에서 하마 한 송이를 짙붉게 피워 올렸다. 사그라지는 세밑에 온통 사랑의 열정을 내뿜는다. 게다가, 한쪽 까마중 잡초는 마른 잎사귀에 까만 열매들을 달고 하늘거리는데, 다른 한쪽 까마중은 연초록 잎사귀에 오종종히 하얀 꽃들을 피운다.

누르스름한 개똥쑥의 자잘한 열매는 마지막 향기를 못내 풍기는데, 제라늄 다홍빛 꽃 한 송이는 어이 이제 또 피어 새로운지 정녕 가관이다. 연분홍 철쭉과 새하얀 치자의 쪼끄만 꽃망울들은 이미 내년 봄을 꿈꾼다. 이 모두는 바로 춘하추동 사철 꽃밭, 우리 집 발코니 수십 종 화초들의 생몰운행 모습이다. 사철 오만 꽃들이 피고 지는 작은 식물원이다. 공기와 물과 여닫는 알루미늄 섀시 창문이면 족하다.

나는 비록 군자가 못 되고 덕이 없지만 대자연 초목들이 스스로 누옥의 경지를 벗어났으니 공자가 다 놀랄 일이 아닌가.

저 9세기 초엽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 살아 있다면 그의 글월 ‘누실명(陋室銘)’은 이제 덕이 없어도 향기롭다고 바꿔 써야 할 판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세상이 좋아서 겨울철 꽃밭이 아니다. 어쩌면 단표누항의 나로서는 일부러 이 초목 속에 묻혔는지 모른다. 저 유우석이 때는 원시 아날로그 정보의 한정 시대였으나, 지금은 디지털 인터넷 해인시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이 가장 옳은 걸로 착각하며 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처지는 무시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주장을 강요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기득권 언론과 여야 정치, 입법·행정·사법계 전·현직 지도층이 그러하다.

나는 지난주 금요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인구위기-저출산 극복 전략의 모색’ 행사에 경축시조 낭송자로 참여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을 학자·공무원 위주에서 실제 경험 있는 일반인 위주로 구성, 김건희 여사를 비롯한 지도층들이 앞장서서 아기 친화 행위 솔선수범, 외국인 불법체류자 42만 명의 정상 정주 여건 조성 등을 주장했다.

마침 며칠 전 자정 무렵 집 근처 골목에서 헤매는 카자흐스탄 남학생 가족을 처가 머잖은 곳에 숙소를 잡도록 도운 일이 있다.

1년간 한국어를 공부하러 부모와 함께 왔는데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게 잘못됐고, 휴대전화까지 분실해 처가 112로 신고해 순찰 중인 경찰차가 왔다. 그래서 짐 많고 서툰 이 외국인들을 숙소까지 좀 안내할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자기 업무가 아니라며 돌아갔다고 한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 이때 좀 도와줬으면 나라 이미지가 높아졌지 싶다. 내방 외국인에 대한 공직자의 적극행정을 촉구한다. 

심포지엄 마지막에 결혼상담소 운영자가 결혼 시 1억 원의 주택자금 지원을 건의했다. 발제자 중에도 허경영 총재를 거론했는데, 이는 그의 33정책 중 결혼혁명 항목에서 결혼자금 1억 원, 주택자금 2억 원, 도합 3억 원이 지원돼야 한다로 귀결돼 얘기를 나눈 이들은 한결같이 동의했다. 이에는 물론 국회의원 100명 축소와 같은 국가 대개혁으로 예산을 절감하는 조치가 취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나는 지난주 겨울비가 오락가락하는 오후 늦게 오랜만에 뒷산을 올랐다. 옅은 안개 속에 옛길을 좇아 홀로 걸었다. 몇 년 상간인데 산 중턱에서 마주친 그 튼실하던 팥배나무 본 둥치가 허물어 쓰러져 있었다.

알알이 맺힌 빨간 열매들을 따던 생각에 가슴이 저몄다. 우리 인생도 그러려니 여기면서 다시 바윗길을 내려올 때 간간히 울리는 천둥이 더 겸허하라고 속내를 때렸다. 남도에는 때 이른 개나리가 피었다는 소식이다. 머잖아 납월 홍매도 필 것이다. 올 마감시조 올린다.

- 반추 - 

꽃들은 피고 지는데
또 한 해가 가는구나
 
기다려 주지 않는
그 세월을 원망하랴
 
덧없는
저 인생살이
끝점 하나 더 찍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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