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산천의 푸르른 초목이다. 싱그러운 자연의 색이 바로 녹색이기 때문이다. 평온하고 건강한 느낌을 주는 초록색은 신호등의 진행지시 및 구급, 구호, 비상구 등 안전을 상징하는 색으로도 활용된다. 그런 맥락에서 ‘그린 북’이란 제목을 보면 ‘수목원 관광 안내서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녹색 책으로 불리는 ‘그린 북’은 사실 흑인 운전자를 위한 가이드 북을 말한다. 이 책은 뉴욕의 우체국에서 일하던 흑인 빅터 그린이 제작한 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따 책 제목을 정하고 표지도 녹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936년부터 30년간 발행된 이 책은 미국 내 인종차별로 흑인들의 자유로운 여행과 이동이 어려웠던 시절,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지역별 숙박시설, 식당, 주유소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1962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린 북이 필요했던 인종차별 시기를 소재로 한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입담 좋은 토니는 클럽 문지기이자 해결사로, 난동부리는 고객을 단숨에 제압할 만큼 터프한 상남자다. 그러나 가게 보수 공사로 두 달간 실직자가 되자 새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다행히도 지인 추천으로 운전기사 일을 소개받게 되는데, 하필이면 모셔야 할 고객이 흑인이다. 토니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흑인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보수가 좋은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로 일하게 된다. 

고용인인 셜리는 유명 피아니스트로 백악관에서도 두 번이나 초청될 만큼 실력이 뛰어난 뮤지션이다. 토니의 임무는 8주간의 콘서트 투어를 차질없이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 토니는 그린 북의 안내에 따라 숙소와 식당을 찾아다니며 그간 미쳐 알지 못했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높은 교양수준과 고상하고 박학다식한 셜리는 연주회장에서는 실력 자체로 언제나 박수갈채를 받는 주인공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대에 있을 때에 한정된다. 셜리는 공연장 내 식당 뿐만 아니라 화장실조차 이용할 수 없었다. 셜리가 받아야 하는 숱한 차별과 모욕적인 언사의 모든 이유는 피부색으로 귀결됐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목격한 토니는 자신도 빠져 있던 한 인종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지를 알게 된다.

영화 ‘그린 북’은 인종차별이라는 어쩌면 해묵은 그러나 여전히 이 세계가 극복해야 할 문제를 무겁지 않은 톤으로 그리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인종차별은 다소 먼 이야기로 느껴 지기도 하지만 인종을 뺀 장애인, 소수자, 이민자, 계층, 지역, 성별, 학벌, 세대 간의 차별은 우리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주요 갈등이기도 하다. 어쩌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은 충분히 바꿀 힘이 있는데 세상이나 타인만을 탓하며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려는 작은 실천만으로도 차별과 갈등이 줄어들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소외되는 이가 없는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공동체는 거대한 시스템이 구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영화 ‘그린 북’은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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