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 인하대 영어교육과 교수
이현우 인하대 영어교육과 교수

전한 말기 4대에 걸쳐 천하모(天下母)로 떠받들어지다가 조카 왕망(王莽)의 찬탈로 왕조가 바뀌는 일을 겪은 후 효원태황태후 왕정군(王政君)이 다음과 같이 회한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정언에 요언이 뒤섞여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 나라가 이 지경이 됐다."

2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왕정군의 이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그 시사점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용어 또는 개념 정리부터 명확하게 하는 게 필요한 듯싶다. 

정언(正言)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바른 말 또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의어로 ‘단언’, ‘직언’, ‘바른 말’, ‘참말’, ‘정말’이 있다. 반면 요언(妖言)은 인심을 혼란하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말 또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의어로 ‘참언(讒言)’, ‘낭설’, ‘뜬소문’, ‘헛소문’, ‘유언비어’가 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이후 시대에서는 이러한 사전적 구분이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왕정군의 말이 시사하는 첫 번째는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된 이래로, 정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요언조차 어느 시대, 어느 체제, 어느 사회에서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그러리라는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유언비어 유포죄가 요언(독립 후 사실로 밝혀진 것도 포함)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알듯이, 아무리 엄하고 혹독한 법도 요언을 단속할 수 없음을 뜻한다.

왕정군의 말이 시사하는 두 번째는 국정을 이끄는 사람이 정언과 요언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지 못하면 국가 존속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엄중한 사실이다.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더 센 권력을 가질수록 다수의 요언을 멀리하고 소수의 정언을 따르려는 노력을 더 등한시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정언을 멀리하고 소수의 요언을 따르려고 하는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든다. 문제는 암군(暗君)일수록 이런 성향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데 있다.

물론 정언과 요언의 구분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군사부일체가 강조됐던 왕정시대나 신문, 방송 등의 대중매체를 통한 레거시 미디어 시대에서도 정언이 요언이 됐다가 요언이 정언이 됐다가 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사람의 해석 없이는 진실이 실재(實在)할 수 없고,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대개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것에 우리 해석이 가미된 결합체에 불과해 영원불변하지 않고 시대적 또는 상황적 해석이 바뀜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람은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고 발휘하는 과정에서 대개 자신이 듣거나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매몰된다. 사람마다 듣거나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하나의 사람, 일,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나 전하는 데 있어서나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천성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어쩌면 이런 차이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때로는 경쟁, 때로는 협력 관계 속에서 인류 발전을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정언과 요언을 논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해석이야 얼마든지 달라진다 해도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확인할 기반은 거짓이 돼선 안 된다. 신자유주의와 1인 미디어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 중 하나는 사람들이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자신이 듣거나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더욱더 빠져들고,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언 혹은 현 시대의 말로 가짜 뉴스가 기생할 공간이 한층 더 커졌다. 

가짜 뉴스는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확인할 기반의 일부마저 거짓으로 채우기 때문에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 사실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사회적 흉기다. 하지만 이런 흉기를 법으로 금할 수는 없다.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잡는다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사자성어처럼 가짜 뉴스를 금한다는 법이 도리어 진짜 뉴스의 일부인 건전하고 다양한 해석마저 막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짜 뉴스가 우리 삶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세기 대수학자이자 대철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이미 답을 제시한 대로, 우리 각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탐구의 습관을 갖춰 문제를 시비곡직에 따라 판단해 일방적인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경계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이룰 때 정언과 요언의 논쟁은 무의미해지고, 정언과 요언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혼군(昏君) 때문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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