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고려는 대장경 판각을 세 차례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고려대장경은 1011년 법장으로만 판각됐다. 부인사에 보관된 대장경 부기에 신라에서 판각됐다는 속전도 있다 한다. 1232년 몽고군 침입으로 분멸된다. 두 번째는 1086년 대장경 발원이 있었다. 세 번째는 1237년 발원 후 1248년 대장경이 완성된다. 

불교 수행자들이 공부하기 쉽도록 법장·경장·논장으로 분류된 고려대장경이 해인사에 보관됐다. 고려대장경 간행 1천 년이 되는 2011년 경남 남해군에서 불교계의 기념 법회가 있었다. 법회 강연에서 불교서지 학자 박상국 교수는 1236년부터 1251년까지 대장경 판각을 했다는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려대장경은 1237년 시작해 1248년 완성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인천 강화 선원사는 대장경 판각 장소가 아니라고도 했다. 대장경 판각 장소로 남해설·강화설이 있지만 박상국 교수는 고려사 등 관련 문헌들을 샅샅이 살펴본 결과 대장경 판각은 경남 남해군에서 판각했다는 학설을 제시했다. 

대장경은 중국에서 처음 판각됐다.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해 장경이 인각된 시기는 중국 수나라에서 시작했다는 학설과 당나라에서 시작했다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 각각이었다. 송나라 태조 시기에 판각된 대장경을 촉판이라 불렀다. 태종 때는 대장경을 총괄하는 역경원을 설치한다. 중국에서 처음 대장경을 판각한 장소는 성도다. 

대장경을 인쇄한 기록도 나라마다 다르게 본다. 당나라 개원록에서는 대장경 권수를 5천100권이라고 한다. 고려는 대장경 발원 전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991년에 가져온다. 고려 사신 한언공이 990년 송나라를 다녀오면서 가져왔다. 신라는 928년 대장경을 가져왔다. 신라 사신 홍경이 중국 당나라를 다녀오면서 대장경을 가지고 예성강에 도착하자 임금이 직접 맞이했다. 재석원에 보관했다. 고려는 대장경으로 나라의 내우외환을 이겨 내려고 발원하게 됐다. 호박나무로 판각된 고려대장경을 려본이라고도 불렀다. 

고려대장경은 일본에서는 간직하고 싶어 하는 불교경전 물품이었다. 고려에서 대장경 판각을 완성했다는 소식에 일본은 수차례 사신을 통해 요청했으나 거절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일본 아사카가 막부와 도큐가와 막부에서도 고려대장경을 갈구해 사신들을 보냈다는 자료가 있다. 일본에도 송나라 대장경이 986년 들여와 있었다. 

고려대장경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1462년이었다. 일본 불교사찰 유교사에 화재가 난 후 재건을 위해 조선의 도움을 받고자 사신을 보낸다. 대장경 등 여러 물품들을 요청하면서 고려대장경을 선물로 받아 갔다. 1482년에도 다카에라는 일본 사신이 온다. 대장경을 요청하자 선물로 보낸다. 야마도에 있는 원성사에 보관했다. 도큐가와 막부가 원성사에 거액의 금품을 기부하고 고려대장경을 도쿄의 증상사로 옮긴다. 1763년이었다.

증상사 윤당에는 세 종류의 대장경이 있다. 고려·송·원나라 대장경이 보관됐다. 고려대장경은 해인사 보존본과 같은 것이다. 일본 국보로 1899년 지정했다. 교토 동본원사에도 고려대장경이 있다. 교토 건인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은 화재로 대부분 소멸되고 49상자만 남았다. 일본 내 고려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닛고우에 있는 윤왕사의 자안당에도 고려대장경이 있다. 감색 표지에 청색 실로 철이 됐다. 교토의 남선사·삼국사, 오오미의 석산사, 고야산의 삼정사·법원사에도 고려대장경이 있다. 도쿄의 천초사에는 원나라 대장경이 있다. 우지의 제호사에는 송나라 대장경이 있는데, 일본 내 송나라 대장경 중 가장오래됐다. 

대장경은 몽고·서장·만자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한자로 된 대장경보다는 못하다고 중국은 자랑하기도 했다. 중국은 불교 경전 번역에 있어 으뜸이라고도 자랑했다. 일본에서도 고려대장경을 세계를 향해 자랑해도 좋다는 말들을 오래전부터 했다. 시사월간지에 꾸준히 고려대장경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고려대장경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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