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새해 신새벽, 집을 나선다. 중천에 뜬 구름 속 반달이 비추는 길을 따라 첫 전철을 탄다. 두툼한 암흑색 외투에 운동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방을 멘 사람들, 거개가 중·노년층이다. 경비, 청소, 지하철 택배 등 새벽 일찍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분들일 테다.

출발 전 대기하면서 대개 눈을 감고 쪽잠을 청한다. 간밤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잠시만이라도 생업 격무에 지친 피로를 푸는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분초가 흐를수록 다음 정차 역에는 젊은이도 하나둘 보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차창 밖 아파트 불빛은 개천 물살에 조는데 천변 길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하는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 환승역 주변에는 오토바이 택배 배달부, 리어카 청소부들이 벌써 일하고 입구 간이 포장마차에는 삶은 달걀, 꼬치어묵, 토스트 등속의 즉석 요기로 아침을 때우는 이도 있다.

올 새해 서울 한쪽의 신새벽 모습이다. 이를 바탕으로, 젊은 한때 포천 산정호수 민박집에서 본 신새벽 별빛을 상상으로 끌어와 비춰 본다. 눈부시다 못다 해 온몸째로 휩싸돌며 쏟아지던 그 별빛 알갱이들이 여태 가슴에 박혔다. 생업 전선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무명 민초들의 도회지 신새벽 풍경이 슬프지만 이를 미화해 그려 봤다.

"…어둑새벽 지하철 첫차에는/ 늙수그레한 얼굴들로 가득하다/ 신새벽은 탄생을 위한 진통의 시간/ 다가올 아침녘 뒤차를 탈/ 쪽빛 청청한 후대들을 위한 선탑승(先搭乘)/ 막바지로 희생하는 인연의 진통." 2010년 지은 내 졸음 자유시 ‘첫차’의 일부다. 요사이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진부하나마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로 자위해 본다.

새해 새 아침, 올 신정에는 만설에 산을 올랐다. 수십 년간 오르내린 근처 산이다. 이제 아내와 둘이서 오른 게 인생유전이요 연륜의 세월 탓으로 돌리기엔 왠지 서어하다. 무릎이 약한 아내가 얼마나 더 함께 오를까 싶다. 밤새 낀 살얼음판 도회지 길바닥을 지나 다다른 산기슭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작년 세밑에 내려 쌓인 눈밭이다. 아내 걸음에 맞춰 조심스레 헤쳐 오르는 숫눈길은 되레 덜 미끄러웠다. 너무너무 깨끗해 솔잎에 이는 실바람도 비껴 가는 듯, 길 없는 길을 따라 맨 처음 밟고 가는 새하얀 염결성은 저 8세기 인간 발길 끊어진 유종원의 ‘강설(江雪)’ 분위기와 흡사했다면 억설일까. 게다가 지난 강추위와 달리 날씨마저 삽상했다.

뽀드득 뽀드득, 적설에 박히는 발자국 소리는 한순간 저 아득한 동심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막 백설공주가 살아올 듯하다. 맘이 드맑아진다. 순간 온 산야 푸나무를 뒤덮은 백설 세상이 펼쳐진다. "누가/ 이렇게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용서해 본 적이 있는가∥희디흰 보혈 송이로/ 온 세상을 뜨겁게 덮어주는/ 만설의 품사위 같이." 내 자작시 ‘만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락산 보루에 다다라 맞은 일출의 광채는 감격 그 자체요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찬란한 빛 누리에 맞춰 인근 산줄기 중턱에 낮게 깔린 안개구름 위로 펼쳐지던 서울·경기 도회지 모습들은 섬처럼 등대처럼 떠 있는 환상 속 낙원이었다. 한동안 세상 시름을 잊고 쉴 새 없이 동영상을 찍어댔다. 어지간히 정경을 담고 나서 내려오는 길목의 산언저리 샘터에서 퍼 마신 샘물 맛은 신선했다. 신정 원단 청정수로 두 눈동자까지 씻고 났을 때는 지난해 묵은 때가 다 사라진 듯했다. 마침 주변 잣나무 가지 사이로 유독 까치가 반겨 짖어대어 상서로움을 더한다.

올해는 갑진년 청룡의 해, 고구려 강서대묘 사신도의 동쪽 벽화 청룡이 떠오른다. 1988년 동해 울릉도 앞바다에는 차오르던 용오름 현상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용의 해였다. 지구촌 동방의 나라 한국, 동해 청용이 승천하듯 새해 일출은 빛났다. 길조다. 반면 예측불허의 충격적인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다가온다. 국민 상당수의 부정선거 우려 인식에도 당국의 확실한 개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정치선진국은 요원한가. 양극단의 확증편향 사회를 비판한 장기표 대표의 특권폐지운동은 반향 없는 메아리로 끝나는가. 독자들의 행운을 빌며 올 첫 시조 올린다. 

- 용꿈 꾸는 세상 - 

어둠이 깊을수록
신새벽을 기다리어
 
흰 눈밭에 돋는 저 해
속속들이 다 비추듯
 
저마다
용꿈을 꾸어
빛 누리에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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