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왜 사람들은 달리 해석해 서로를 응징의 대상으로 여기는 걸까요? 왼팔과 오른팔이 자신만이 몸의 주인이라고 다투면 각각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일곱 가지 다른 색깔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때 무지개가 아름다워지겠지요. 그런데 마치 무지개를 한 가지 색으로 만들어 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한 요즘의 거칠어진 세상을 보면 무척 안타깝습니다.

이런 행동의 밑바탕에는 ‘분별심’이 도사립니다. 분별심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선한 마음이 분별심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분별심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길 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나에게는 옳은 것이 너에게는 그른 것일 수 있고, 나에게는 그른 것이 너에게는 옳은 것일 수 있다는 이치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툼에서 조화로움으로 바뀝니다.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조카 아이에게 가게에서 양파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뿌듯한 얼굴을 하고 들어온 아이의 봉투 안에는 양파는 없고 양파깡이 들어 있었다. 그 아이는 어른이 시킨 심부름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지만 그 아이의 세계 안에서는 최대한의 행위였다."

어른이 말하는 양파를 아이는 ‘양파깡’이라는 과자로 이해했습니다. 어른의 ‘양파’와 아이의 ‘양파깡’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양파를 바라보는 기준이 달랐던 겁니다. 즉, 각자의 기준으로 보면 둘 다 올바른 판단을 한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옳고 그름에 대한 적절한 ‘기준’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실수와 실패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자신의 기준대로 판단하고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 기준과 타인의 기준이 다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때는 각자가 믿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충돌하게 되고, 그 충돌이 치열한 다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는 벗에서 적으로 바뀌곤 합니다.

원래 옳고 그른 것이 있기는 한 걸까요? 착했던 사람도 악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착한 사람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는 않을까요? 「뒤주 속의 성자들」(김윤덕)에서 저자는 "내 마음에 맞는 것은 다 옳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나쁜 것이었던가? 좋은 것과 나쁜 것, 잘난 것과 못난 것, 진짜와 가짜, 이런 부질없는 가름이 있었기에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가 생기고 우등생과 열등생도 생겼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법륜 스님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를 이렇게 일러 줍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면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행복하다. 그런데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의 평가에 매달리니 허무해지는 거다.

두 가지 삶이 있다. 허세를 부리고 헛된 욕망에 삶을 낭비하고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학대하며 사는 삶이 하나이고, 자신은 능력이 없다고 여기고 무기력하게 살거나 남을 원망하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삶이 나머지 하나다. 그러나 세상 기준에 나를 맞추며 살다가 그것이 충족돼도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욕구를 버리거나 기대를 낮추는 만큼 기쁘고 만족스럽다."

분별심이라는 ‘욕구’를 내려놓을 때, 즉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내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때 비로소 행복이 따스한 미소를 보낼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을 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여기는 것이 내 욕구와 기대를 낮추는 일이고, 이것이 행복의 비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때 양파깡을 품에 안고 들어오는 아이를 웃으며 안아 주는 행복한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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