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주 변호사
박노주 변호사

이 세상에는 심성이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선과 악 사이에 분포됐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심성은 거의 선천적이라는 점이다. 환경 영향도 있겠지만 미미한 듯하다. 더구나 생활환경도 부모와 관련해 거의 주어진 조건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결국 선악은 거의 신에 의해 부여됐다고 할 수 있다. 인간 각자가 자신의 심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자유의지도 공허하다. 이런 상황에서 심성이 선한 자는 추앙하고 악한 자는 미워하는 것이 정당한가. 사람의 육체는 잘 생긴 사람과 못 생긴 사람이 있다. 이 경우 못 생긴 것을 그 사람 책임으로 돌려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심성에 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정당한가. 자신의 책임도 아닌 심성을 이유로 평생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뢰 부여가 오히려 악에 대한 최후의 방파제일 수 있다.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할 때 악의 방파제는 무너져 버린다. 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도 마음 한 구석에는 명예심이 남았다. 악한 행동의 뿌리도 그릇된 명예심에 기인했을 수 있다. 명예심은 타인의 평가를 전제한다. 명예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악을 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면 악을 근절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와 현실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인간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다. 악한 사람도 존재 이유가 있기에 신이 창조했을 것이다. 선한 사람과 같이.

의뢰인의 말에 따르면 소송 상대방은 대부분 악마다. 세상에 그렇게 사악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를 도와주는 변호사도 같은 부류라고 입에 거품을 물며 거듭 되뇐다. 아마 소송 상대방도 의뢰인과 나에 대해 동일하게 반응할 테다. 결국 법원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악마라고 불리는 족속들이다. 의뢰인은 소송 상대방의 실체에서 좋은 점들은 버리고 미운 점들만 고른 다음 악마의 틀에 부어 형상화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창조한 악마에게 갖가지 분노를 쏟아붓는다.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경우 사회 곳곳에서 동일한 현상이 벌어진다. 요즈음 정치 현실을 보면 암담하다. 불행한 일이다.

선행이 타인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심리적 고문이 될 수도 있다. 질투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인간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선행이 적선으로 비쳐진다. 거지가 아닌 사람에게 적선은 무례다. 선행을 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선행은 지속되기 어렵다. 인간은 대부분 나약하고, 선행의 철학적 기초가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선행은 이 세상을 떠돌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 예지의 역할은 선과 악을 간파하되, 그 근원이 인간의 책임범위 밖의 문제임을 밝히는 데 있다.

젊은 시절 사법시험에 거듭 실패하면서 포기하고 선물가게를 운영하려던 때가 있었다.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파는 사람까지 모두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특히 선물을 파는 사람은 어떠한 선물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지를 늘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아주 행복하리라 봤다. 행복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 세상에 그렇게 좋은 직업은 없다. 그러나 주위 만류로 생각에서 끝나게 됐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타인의 분쟁에 휩싸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문득 선물가게를 꿈꾸며 행복에 잠기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나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러한 삶이 더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정신적이거나 영혼적인 것이 부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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