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등산과 같다. 정상에 오르려고 고군분투하는 시간은 길고 어렵고 힘들다. 정상에 선 기쁨은 포기하지 않고 오른 사람만이 만끽하는 행복이다. 비록 머무는 시간은 짧지만 그 가치는 충분하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하산이다. 올라가는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내려가는 속도는 상대적으로 빠르다. 잘 내려가는 방법에 대한 숙지 없이 가다 보면 가속도가 붙어 쉽게 넘어지기도 한다. 앞선 경험이 토대가 돼 더 높은 등정에 도전하듯 우리 삶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간혹 대단한 노익장을 선보이며 인생 후반부에 전성기를 이뤄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청장년기에 화양연화를 보낸다. 영화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의 삶도 그랬다. 1980년대를 누구보다 화려하게 보낸 프로레슬러였지만 이제는 한물간 왕년의 스타가 돼 버렸다. 

환갑에 가까운 랜디는 오랜 대결로 몸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그래서 다량의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가 어렵다. 귀도 침침해 보청기 없이는 잘 들리지도 않는다. 주중에는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지만 언제나 생활고에 허덕인다. 당장 급한 약값과 레슬링 경기를 뛰기 위한 몸 치장인 염색, 의상 구입, 태닝에 돈을 쓰다 보면 월세를 내지 못해 변두리 트레일러에서도 쫓겨나기 일쑤다. 

그럼에도 랜디에게 프로레슬링은 삶의 전부였다. 20년 전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함성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비록 이젠 몇 명 모이지도 않는 초라한 무대에서 펼치는 적은 일정이 전부일지라도 랜디는 레슬링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오직 과거 영광만이 현재 자신을 대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시절 랜디는 가정에 소홀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일조차 챙기지 않았다. 그 결과 가정생활은 파탄 나고, 딸은 연을 끊고 살아갔다. 그의 친구는 간간이 비디오게임을 하러 오는 동네 꼬마들과 은퇴를 고려 중인 스트리퍼 캐시디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경기 후 극심한 심장 통증으로 응급 수술을 받게 되고, 선수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결과를 듣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두 번째 삶이 주어졌다고 판단한 랜디는 마트 정육코너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또 딸을 찾아가 과거를 사과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계획은 꼬여만 간다. 결국 랜디는 선수생활 은퇴를 번복하고 생명 위험마저 감수하며 사각 링에 선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더 레슬러’는 제65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과 함께 주연 배우 미키 루크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 랜디의 삶을 한때 잘나갔으나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 미키 루크가 연기해 몰입도를 높였다. 

‘더 레슬러’는 짧지만 화려한 전성기 뒤에 오는 길고 긴 내리막길을 랜디의 뒷모습을 자주 비추는 방식으로 반영했다. 자기를 알아주는 곳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무리를 택한 결심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마치 낭떠러지 같은 그 결정만이 유일한 길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삶은 한순간 불태우는 형태로 소멸되지 않기에 잘 하산하는 방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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