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만 변호사
박영만 변호사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집단중독사건, 문송면 수은 중독사건 등 노동자 건강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개정돼 근로자에게 정기적으로 안전보건교육을 하고, 유해·위험작업 근로시간도 제한했다. 안전보건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진료를 담당할 전문의사가 필요하다고 해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현장의 안전보건 상황도 개선됐다.

산업현장의 안전보건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악화됐다. 기업은 필수불가결한 생산업무를 제외한 많은 업무를 외주화했다. 경비나 식당뿐 아니라 설비 유지·보수 업무도 하청업체에 맡기면서 안전보건에 문제가 생겼다. 생산설비 관리는 회사에 소속된 작업자가 직접 담당하는 게 맞다. 평소 설비를 다루던 사람이 보수 업무도 하는 편이 안전하다. 설비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외부 하청업체 작업자가 평상시 다루지 않던 기계를 수리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전문적으로 오랜 기간 그 설비만을 정비하는 작업자라면 내부 작업자보다 더 효율적으로 수리할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아서 문제다. 

협상력이 우월한 원청업체는 한번 책정한 작업단가를 올리지 않기 때문에 하청업체는 경험 많은 작업자를 계속 고용할 수 없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신참이 일해야 한다. 수많은 산재사고가 새로 들어온 하청업체 작업자가 익숙지 않은 업무를 하다가 발생한다.

원청업체가 위험한 작업을 외부 업체에 하청을 주는 가장 큰 원인은 원청 작업자들이 위험한 일을 싫어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기업 직원들은 더럽고 힘든 작업은 하청업체에 맡기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노동자 대단결을 외치던 이들이 어느 사이에 기득권자가 돼 노동자를 우리와 그들로 나누고, 힘든 일은 그들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필자가 의사 업무를 하던 시절, 대기업에서 경비 업무를 하던 하청업체 소속 경비원 건강검진을 원청 회사 체육관에서 한 적이 있다. 이들은 24시간씩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새벽 교대시간에 잠깐 짬을 내어 건강검진을 했다. 당시만 해도 야간 작업을 하는 분들이 건강검진을 받을 만한 병원이 회사 근처에 별로 없어 의료진이 회사로 직접 가서 검진을 하곤 했다. 한참 체육관 구석에서 경비원들을 검진하는데, 아침 운동을 하러 온 원청업체 직원들이 운동을 해야 하니 다른 곳으로 가서 검진을 하라고 했다. 부랴부랴 장비를 옮겨 원청 직원들 눈에 안 띄는 운동용품 보관창고로 들어가서 검진을 했다. 검진을 마치고 나가면서 주차장을 보니 운동을 마친 원청 직원들은 자가용을 운전해서 출근하고, 경비원들은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언제부터 노동자들이 이렇게 됐을까? 노동자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업과 ‘제3자 개입 금지’ 같은 악법에 맞서 싸우느라 노조는 점점 사나워지고, 자신들이 얻은 권리를 악착같이 지키려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이제 대기업 직원들은 하청업체, 비정규직, 청년 작업자들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한다. 여기에는 괜히 노조와 다투는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기업뿐 아니라 정부도 한몫했다. 정부는 규제 완화라는 명목으로 기업이 현장에 안전보건인력을 두지 않을 수 있게 해서 사업장의 안전 역량은 계속 약화됐다. 안전관리업무를 외부 기관에 맡겨 안전관리도 외주화됐다. 

현장은 작업자들이 가장 잘 안다. 더 이상 위험과 안전관리를 남에게 떠넘기지 말고 기업 내부로 가져와야 한다. 적어도 안전보건만큼은 원청과 하청을 나누지 말고 함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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