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삶은 관계의 상호작용이다. 서로 믿는 신(信)은 삶의 중심이자 뿌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삶을 선(善)하고 조화(和)롭게 끌어가는 네 방위(方位)다. 인의예지신은 우리 사회의 공기와 같기에 맑은 공기 속에서 열고 달고 맺고 닫도록 과정을 살펴야 한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공정(公正)을 다투는 논의가 많았다. 청년들은 기회의 문제였기에 특히 민감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공정과 관련한 논의는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분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눈앞의 이익에 멀어 근간이 흔들리고, 또한 원만하게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새로운 분란이 시작된다. 일을 매듭짓고 닫지 못하면 맺었던 결실마저 흔들린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요원해진다.

그리스신화를 다룬 명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올림포스 모든 신들의 힘을 합친 것보다 강한 힘을 가졌던 신(神) 중의 신 제우스에게도 공정은 어려운 과제였다. 세상사에 행(幸)과 불행(不幸)을 분배하는 것은 제우스가 가진 권능 중 하나다. 행과 불행이 공정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최고의 신이라도 권위를 인정받기는커녕 골치만 아플 일이다. 묘책이 없을까 고민하던 제우스에게 모순(矛盾)이라는 방책은 신의 한 수였다. 세상에 온전히 행(幸)인 것은 없고, 온전히 불행(不幸)인 것도 없다. 고난이라는 불행을 풀어헤쳐 보면 그 안에는 행이라는 선물이 들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행복을 만나는 순간 그 안에는 구속하고, 구속된다는 절망이 손을 흔드는 모순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제우스는 행과 불행을 모순이라는 그릇에 섞어 버렸다. 행과 불행을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선택은 인간의 몫으로 돌렸다. 선택한 이후에 따르는 책임도 인간의 몫이었다. 제우스는 자신이 뿌려 놓은 모순을 인간들이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하늘에서 술 한잔 걸치면서 인간들이 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내면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불안을 일으키는 상황은 다양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빼놓을 수 없다. 죽음은 먼 미래의 일 같지만, 인간의 잠재의식은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죽음을 경험한다. 불사(不死)의 몸이라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결국 죽는다는 것, 즉 유한한 존재라는 각성은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이유이면서 까닭을 알 수 없는 근원적 불안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세상은 불안감에 기대어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길을 걷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듯이.

진정한 존재 양식을 가능케 하는 죽음이라는 유한성이 동전의 한 면이라면 다른 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당연히 탄생이다. 진정한 기적과 가능성은 새로운 탄생에서 나온다. 갑진년 새해에 태어난 아이가 아닌 우리에게 탄생이란 자기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2024년에 기대하는 내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험한 세상의 한복판에 던져진다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옆 사람을 밀어내는 선택을 한다면 서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믿음이 없는 사회는 우리를 억압하는 시스템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주위 아픔을 보면 내 아픔처럼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공감하고 믿어 주는 건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이 여기에 기반한다면 불안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 탄생할 수 있다. 서로 믿는 신(信)은 인간관계의 뿌리다.

2024년, 벌써 한 달이 지나간다. 연초에 세운 계획들이 하나둘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불안한 마음은 커진다. 생각해 보자. 지난해 만점을 맞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길을 걷는 인간의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우리를, 우리 사회를 바꿀 강한 힘이 있다. 그 처음은 자기 자신을 믿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만큼은 나에게 내 작은 손을 내밀어 최초의 악수를 하자. 나를 믿자. 서로를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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