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봉 시인
문계봉 시인

얼마 전 야당 대표가 60대 남성에게 흉기 공격을 받아 온 사회가 충격에 빠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여당의 한 여성 정치인이 중학생에게 머리를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피습 사건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혐오와 적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 사례라 하겠다. 

물론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서로를 걱정하며 챙겨 주는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한 사회 안에서 대립과 갈등 없이 조화로운 삶을 영위한 적은 많지도 않았고 그 기간이 길지도 않았다. 어쩌면 ‘사회적’이란 단어 자체가 곧 대립과 갈등을 전제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동물들이 한 사회 안에서 각자의 안온한 삶과 이익을 위해 대립하는 건 필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길짐승, 날짐승과는 달리 생각하는 존재다. 그래서 종종 어떤 것이 해당 사회와 자신, 더 나아가 이웃을 위해 이로운가를 간헐적으로 고민하는 이타적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본능과 죽음, 약육강식의 논리만 관철되는 정글과는 다르게 온정이 있고, 대화가 가능하며, 절충과 양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정치다. 오직 본능적 폭력과 선취(先取)를 위한 양보 없는 투쟁만 존재하는 사회라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저 정글 속 금수들은 다를 게 무엇인가.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대화와 상호 이해가 실종되고 오직 혐오와 적대, 대립만이 팽배할 때는 그 사회의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다. 정치가 잘못된 세상에서는 각양각색의 도적들만 그럴듯한 의장을 하고 호가호위와 견강부회를 일삼는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가혹한 정치는 민중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민중들은 살기 위해 동물의 삶을 선택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이 어디 앞선 시대에만 해당하는 말이겠는가. 권모술수만 난무하는 정치,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민중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정치, 진실을 가리고 거짓을 유통하며 정의와 양심을 참칭하는 정치,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상대에 대한 적대와 혐오를 모의하는 정치, 수백·수천의 애꿎은 생명들이 총칼에 죽고, 곤봉에 맞아 죽고, 최루탄에 맞아 죽고, 물고문에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넘어져 죽고, 깔려 죽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 정치, 이 모든 게 현대적 의미의 가혹한 정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가혹하고 천박한 정치가 민중 사이를 이간하고 적대와 혐오를 부추기면서 우리 사회는 극단적으로 양분됐다. 부(富)와 권력이 양분되고, 그것을 좇는 정치가 양분되고, 교육이 양분되고, 노동이 양분되고, 남녀와 노소가 양분되고, 그 양분된 각각의 주장이 날카롭게 대립하며 오늘도 적대와 혐오를 양산한다. 결국 적대와 혐오는 그릇된 정치가 낳은 흉물스러운 사회악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생생한 민낯이다.

한나 아렌트가 일찍이 지적했듯 본디 일상에서 만나는 악은 무척이나 평범해 보일 때가 많다. ‘과연 저 사건을 혹은 저 사람을 악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일상의 악들은 우리 이웃의 얼굴을 하거나 우리가 쉽게 만나고 경험하는 사건의 외피를 썼다. 생각해 보라. 악의 유전인자를 타고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야당 대표의 목을 찌른 남자도 한 가정의 충실한 가장이자 친구들에게는 믿음직한 동료였을지도 모른다. 여성 정치인을 공격한 15세 중학생은 과연 해당 정치인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져 본 후 그런 행위를 저질렀을까? 

그들은 저마다 자기를 변호할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숨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의연하게 나선 것이라며, 왜곡된 신념에 기대 가슴 벅차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사람들이 이처럼 그들의 ‘평범함’에 현혹될 경우 온정주의에 빠져 본질을 간과하기 십상이어서 결국 해당 인물의 일탈행위를 쉽게 용서하고 용인하게 된다. 천박한 정치는 문제 제기와 비판적 성찰을 배제한 채 그러한 용서와 용인을 합리화하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출현이 우연이 아니라 어떤 징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타적·폭력적 의사 전달 방식은 인물들 개인의 문제도 없진 않겠지만, 더 크게는 그릇된 정치와 왜곡된 현실이 만들어 낸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렵다. 정치가 지금처럼 지리멸렬하고, 승자독식 원칙이 일반화된 이 미친 사회가 제정신이 들기 전까지 혐오와 적대의 망령들은 우리 사회 곳곳을 누비며 민중의 삶과 사회 근간을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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