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철학은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누군가가 본질을 말하면 혹자는 "교과서 같은 말만 하네", "그렇게 살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겠나?", "세상 물정 모르고 답답한 말만 하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이든 단체든 자신의 존재 이유에 해당하는 본질을 잊어버리는 순간 ‘배가 산으로 가는’ 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엉뚱한 수다」(앤소니 드 멜로)에서 2개 사례를 찾았습니다.

#1. 어느 죄인이 파문을 당하고 사원 출입이 불허되자 그는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신이시여, 제가 죄인이기 때문에 저들이 저를 제지합니다."

그러자 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뭘 그런 걸 갖고 속상해하느냐? 저들은 나도 못 들어가게 하는데."

#2. 어느 사원에서는 헌금을 평소에 걷지 않고 오직 축제일을 앞두고 좌석표만 팔았습니다. 축제일에는 교인들이 가장 많이 오기 때문입니다.

축제날이었습니다. 한 꼬마가 사원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갔지만 좌석표가 없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꼬마가 "아저씨, 매우 중요한 일이라 아빠를 만나야만 해요"라고 하자, 관계자는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꼬마는 "딱 1분만이요"라며 간절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계자는 꼬마가 안타까웠는지 허락을 해 주고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딱 1분이다. 하지만 사원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들키기만 해 봐라."

사원의 본질을 망각한 행태를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 신랄하게 꼬집었습니다. 물론 대다수 건전한 종교단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잊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가꾸어 주는 작은 이야기」(이도환)에도 흥미로운 예화가 나옵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어느 스님이 도를 깨우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낯선 절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종일 눈을 맞으며 걸었기 때문에 옷차림이 남루해 행색이 마치 거지와도 같았습니다.

주지 스님은 그의 행색을 보더니 찬밥 한 덩어리만 주고는 추운 겨울에 온기도 없는 냉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가 방에 들어가니 한쪽 구석에 나무 불상 여러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부엌으로 가서 나무 불상으로 불을 지피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에 따뜻하게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길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주지 스님이 승방을 열어 보니 방 안은 따끈따끈하고 방 안에 있던 불상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몹시 화가 난 스님은 그를 따라가 따졌습니다.

"이보시오. 당신도 스님이 아니오? 어찌해 섬겨야 할 불상을 모두 땠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를 화장하면 사리가 나온다기에 그랬소이다. 그런데 사리는 나오지 않더이다."

"아니, 지금 장난치시오? 목불에서 어찌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사리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그냥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란 말이오? 그리고 사람을 섬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부처님을 섬긴단 말이오. 이보시오 주지 스님, 사람이 바로 살아 있는 부처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할 주지 스님이 행색이 구차하다며 꽁꽁 언 방으로 안내했으니 불교의 가르침, 즉 본질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남루한 스님의 일갈이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본질’을 잊으면 ‘우상’을 섬기는 웃지 못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본질에 대해 질문해 보면 어떨까요. ‘나는 누구인가?’, ‘우리 단체의 존재 이유는 뭘까?’, ‘국가는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우리로 하여금 책을 열게 하고 귀를 열게 해 우리를 한층 더 성장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