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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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보통 평범한 모습이다. 우리와 함께 잠을 자며, 우리와 함께 밥을 먹는다. 항상 사람이 악마다." 영국 태생의 시인 W.H. 오든의 이 한마디는 인간이 가진 악마성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인간의 존엄성을 난도질하듯 잔혹한 범죄가 세상을 뒤흔들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무서움을 지적하며 그들을 비난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가 흔히 볼 법한 이웃이란 사실은 소름 돋는 진실이다. 결국 악마란 새롭게 창조된 존재가 아닌 인간 그 자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묻지마 범죄들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할 만큼 일상을 공포로 물들인다. 오피스텔 로비에서 피해자를 돌려차기로 기절시킨 뒤 성폭행을 시도한 ‘부산 돌려차기 남’부터 신림동 인근 등산로에서 성폭행을 위해 철제 너클을 낀 주먹으로 피해자를 무차별 폭행해 사망케 한 ‘최윤종’까지. 모두 아무런 이유 없이 일면식도 없던 피해자를 상대로 극악한 짓을 벌인 악인들이자 어쩌면 길에서 한번은 마주쳤을 법한 우리네 이웃이었다. 

그로 인해 도심 번화가, 지하철, 쇼핑센터, 공원, 등산로 등 일상 곳곳이 위험지대가 됐고, 길거리의 누군가가 갑자기 범죄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가 황폐해졌다. 지난해 7월 ‘조선’이란 희대의 범죄자가 서울 신림역 인근에서 대낮에 행인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4명의 사상자를 낸 이른바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은 결정적인 트리거(계기)가 됐다. 이 사건 이후 수많은 살인 예고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덮으며 숱한 모방 범죄를 불러왔다. 살인 예고 범행 역시 점차 진화하면서 처음에는 특정 장소와 집단,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사이코패스에서 최근 들어서는 정치·사회 이슈와 결합해 확신범 행태로 변모했다. 

하지만 살인 예고 범행이 끼치는 해악에 비해 처벌 수위가 너무 가볍다고 느끼는 건 비단 필자만이 아닐 테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형사법에서 이를 처벌하는 명시적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은 살인 예고 글에 대해 살인예비와 협박,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혐의를 적용해 단죄한다. 하지만 살인예비의 경우 범행을 위한 구체적 준비 행위가 있어야 성립되기에 홧김에 또는 장난으로 올린 글은 아무리 끔찍한 내용이 담겼어도 처벌이 불가하다. 

협박은 피해자가 특정돼야 하고 해악의 고지가 피해자에게 도달돼 이를 인지해야 처벌 가능하다. 막연히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했거나 언론 보도가 되지 않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살인 예고 글에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역시 살인 예고 글로 인해 경찰력이 대거 동원되는 등 공무가 현저히 방해될 것을 전제로 한 까닭에 구체적 장소를 특정하지 않아 경찰력 동원이 불가했다면 적용이 어렵다는 불합리가 있다.

부평과 용산 등에서 살인을 예고했던 가해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림역을 목적지로 설정한 내비게이션 화면과 흉기 사진을 게시하며 흉기난동을 예고했던 30대 남성까지 모두 1심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실형을 면했다. 범행을 위한 구체적 준비 행위가 없거나 살인의 고의가 없다고 해 살인예비 혐의가 적용되지 않은 결과였다. 여기에 강남역 화장품 매장에서 엽총 파티를 열겠다며 무차별 총기 테러 글을 올린 30대 남성에 대해 1심 법원은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 협박 혐의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듯 법의 사각지대 속에서 살인 예고 가해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채 여전히 우리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평범한 삶을 산다. 다행히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살인 예고나 폭발물 설치 등을 처벌하는 ‘공중협박죄’ 신설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죄는 크지만 처벌은 미약한 현실, 더는 시민들 일상이 위협받지 않도록 살인 예고 범행에 대한 엄벌이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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