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달걀을 완숙으로 익힌다는 의미의 ‘하드보일드’는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비정한 혹은 냉혹한이라는 맥락으로 활용된다. 따라서 하드보일드 문학이나 영화라 함은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에 대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담한 태도로 묘사하는 스타일을 말한다. 이때 불필요한 수식어 없이 건조하고 빠르게 상황을 전개하는 특징은 부조리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의 반영이다.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미키 스필레인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을 이끈 대표 창조자들이다. 이들의 작품들이 1940∼1950년대 영화로 활발히 제작되면서 범죄와 폭력을 다룬 검은 영화인 필름 누아르가 등장한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키스 미 데들리’는 미키 스필레인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1955년도 작품으로 냉전시대를 강렬하게 풍자한다.

깊고 어두운 밤, 고속도로를 한 여인이 가로막는다. 죽음도 불사한 듯 온 몸으로 차를 멈춰 세운 그녀는 심지어 맨발이다. 트렌치코트를 입었지만 언뜻 봐도 겨우 겉옷 하나 걸친 모습이다. 차를 태워 준 사람은 마크 해머, 사설 탐정이다. 위험한 듯 흥미로운 이 여성은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내려주고 오늘 일은 잊으라 한다. 하나 만약 정류소에 닿지 못한다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큰 차와 충돌한 두 사람은 의식을 잃는다. 

겨우 정신이 든 마크는 어딘가로 끌려 왔음을 직감한다. 이윽고 들려오는 여성의 비명소리. 끔찍한 고문을 당함이 틀림없다. 이런 이상한 일을 벌이는 자는 누구인가? 마크는 의문의 주사를 맞아 또다시 정신을 잃고, 차에 실려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마크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원인과 배후 추적에 나선다. 

이런 행동은 정의감보다는 원초적 복수심과 돈에 기인한다. 마크는 이 사건에서 ‘큰 건’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후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그는 악당만큼이나 악랄하게 폭력을 일삼는다. 그 결과,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얽힌 다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 과연 마크가 마주하게 될 실체는 무엇이며, 이토록 수많은 희생을 감내할 만큼 ‘큰 건’을 잡는 게 중요한 일인지 영화를 보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종반에 이르면 마침내 사건의 본체인 검은 상자가 드러나는데, 작고 뜨거운 이 비밀의 상자는 ‘맨해튼 프로젝트, 로스 앨러모스, 트리니티’와 연관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비밀의 상자는 핵무기와 관련됐음이 밝혀진다. 

영화 ‘키스 미 데들리’는 한 여인의 의문사를 조사하는 사설 탐정의 미스터리한 모험을 따라가는 이야기로, 비밀에 다가가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담아냈다. 결국 상자는 핵폭탄을 연상시키는 장치로서 냉전의 시대상을 은유한다. 대재앙을 몰고 올 상자이지만 모두가 정확한 실체도 모른 채 손에 넣고 싶어 하는데, 이는 주인공 마크도 예외는 아니다. 대의명분보다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직감 속에 자신의 편리대로 사람을 이용하거나 폭력을 일삼으며 탐욕스럽게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처럼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모습은 전후 냉전시대의 자화상으로 이해할 법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무언가 잘못됐음을 거꾸로 올라가는 타이틀을 통해서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세계를 불안으로 몰아가는 건 어리석은 인간 군상의 탐욕에 있음을 냉소적으로 경고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