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주 변호사
박노주 변호사

등산을 하다가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을 바라보면서 문득 자유가 아주 가깝다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현실 도피일 수도 있지만 본향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술, 마약, 게임은 현실 도피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정 시간 현실에서 동떨어진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이 장기화되면 육체와 영혼은 피폐화된다. 영혼이 육체와는 다른 세계에서 장시간 머물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뇌에서 도피할 것이 아니라 극복할 일이다.

우리 눈에 미래가 훤히 보인다면 오늘 분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미래는 실현되기 때문이다. 미래에 장막을 쳐 놓은 것은 신의 각별한 배려다. 나태나 좌절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리라.

인생을 회고해 보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인생을 결과로만 평가하면 인생무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생은 과정이다. 인생은 하루하루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거의 결과로만 평가된다. 인간은 이에 익숙해져 인생무상이라는 관념에 젖게 된다.

결과는 자유의지 말고도 무수한 요인들의 개입으로 이뤄진다. 과정은 미래에 이뤄지는 결과에 오늘의 희망이 더해진 것이다. 미래에 결실을 이루지 못하게 될 오늘의 희망이라도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의 행복은 이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은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약간의 결과와 대부분의 희망으로 이뤄진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잘 살기 위한 준비에 대부분 인생을 바친다. 막상 잘 사는 상황이 되면 인생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인생은 허무하다. 결과는 짧고 과정은 상당히 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이란 긴 시간과 무게를 생각하며 오늘을 못 견뎌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인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다. 오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인생이다. 내일의 큰 웃음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웃음들이 모여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은 늙었다는 징조다. 야누스와는 달리 뒤를 돌아보며 동시에 앞을 볼 수는 없다. 과거는 조금도 변경시킬 수 없다. 신조차도 그러하다. 단지 과거 작품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우울해진다. 가능하면 앞을 바라보며 전진할 일이다.

삶을 단순화할 일이다. 물질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그러하다. 삶의 범위가 확대되면 깊이가 적어지고 혼란이 가중된다. 삶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도 욕심의 소산이다. 삶의 범위를 너무 확대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허상이다. 행복에 대한 그리고 인생의 근원적인 고독에 대한 대책 없이 막연히 수명이 길어지는 것은 큰 불행이다.

현대 의학이 인간들의 수명을 연장시키면서 고통도 연장시키는 면이 있다. 수명을 연장시키며 고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고독에 대한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노인과의 만남이 기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허무하다. 그러나 특별한 인연이나 추억이 없다면 기쁨에 의한 만남은 어렵다. 젊은 시절부터 아름다운 인연이나 추억을 많이 쌓을 일이다.

삶의 종착역으로 서서히 다가가는 사람을 보면 슬프다. 삶과의 결별을 위한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바라보며 속히 생을 마감해 고통이 종식되기를 기원하게 된다. 이별의 슬픔에 대한 신의 치유법인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치매에 걸린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영혼의 영원성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철학과 종교의 무거운 과제다. 나의 치매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임종의 순간에 인생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싶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이를 표현한 후 임종하고 싶다. 그때 보이는 인생의 모습이 아름답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를 표현할 몇 초의 시간이 허락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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