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2018년 11월 카를로스 곤 전 닛산자동차 회장은 자신의 보수를 축소 신고해 금융상품거래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에 체포됐다가 2019년 3월 보석금 10억 엔을 내고 석방됐다. 일본 검찰은 한 달 뒤 특별배임죄를 적용해 다시 체포했는데, 그는 이때 보석금 5억 엔을 내고 다시 풀려났다. 당시 곤 전 회장은 출국금지 상태였지만, 2019년 12월 말 개인용 항공기를 이용해 일본 오사카를 출발해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한 뒤 항공기를 갈아타고 레바논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형사재판을 앞두고 도주한 곤 전 회장은 2020년 1월 8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을 기소한 일본 검찰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금전 비리로 나를 기소한 것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고, "일본 검찰에 의해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잔인하게 떨어져 있어야 했다"며 "14개월 동안 내 영혼을 파괴하려고 시도하고, 내가 아내와 연락하는 것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하루에 8시간이나 조사를 받았는데, 변호사도 동석하지 않았다"며 일본의 사법제도에 대해 "기본적인 인권의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의를 원하기 때문에 일본을 탈출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법정에 설 준비가 됐다"고 강조했다. 

곤 전 회장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즉각 강하게 반발했는데, 모리 마사코 일본 법무상은 다음 날 새벽 기자회견을 열어 "주장할 것이 있으면 우리나라의 공정한 형사 사법제도 아래 정정당당하게 법원의 판단을 받기를 강력히 바란다"고 경고했다. 모리 법무상은 곤 전 회장의 불법 출국을 두고 "어느 나라 제도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고 규정하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내외를 향해 우리나라 법 제도와 운용에 대해 잘못된 사실을 고의로 퍼뜨리는 것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곤 전 회장의 무죄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그가 일본 수사·사법제도의 후진성(비인권성)을 지적한 것은 매우 큰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일본 수사·사법제도의 후진성은 일본 법률전문가들도 심한 비판을 제기한다. 일본에서는 수사기관이 범죄혐의자를 크게 어렵지 않게 체포·구속하고 상당 기간 구금을 연장할 수 있다. 수사기관은 구금기간 혐의자를 심문(interrogation)을 통해 심하게 압박하면서 "혐의를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회유하기 때문에 혐의자들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강압적 구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거짓 자백하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또 대개 외국에서는 묵비권을 인정하면 강압적 혹독한 심문을 행하지 않는데, 일본에서는 묵비권을 인정하면서도 수사기관이 강압적 혹독한 심문을 행하는 것이 현실이며, 이것이 외국과 일본의 큰 차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많은 나라에서는 기소 전에도 보석으로 석방될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기소된 후에만 보석이 가능하도록 보석제도를 제한적으로 운영하며, 수사기관 심문 과정에 원칙적으로 변호사 참여도 제한된다고 한다. 이 같은 후진성 때문에 일본 법률전문가들조차 자국의 수사·사법제도를 ‘인질사법(人質司法;hostage justice)’이라고 자조(自嘲)한다. 말하자면 피의자의 인권을 경시하면서 수사기관의 필요·편의에 따라 피의자를 (인질처럼) 장기간 구금하면서 강압적 혹독한 심문으로 압박해 자백을 받아낸 후 기소하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 따라서 기소 후 법원에서의 유죄판결률도 매우 높다고 한다.

한국 법제는 해방 직후 일본 법제의 지대한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일본의 수사·사법제도와 관행의 후진성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이·잔재된 경우가 있다. 일본보다 앞서서 이런 후진성을 떨쳐내야 한다. 특히 영미법상 우수한 제도를 조속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재판 절차가 검사·판사에 의해 과도하게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참여와 변호사 간 공방에 의해 주도되는 시스템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배심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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