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빈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오유빈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완전한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달프다. 기회비용이 들기도 하고, 환경과 주변인에 따라 급속도로 바뀌기도 한다. 유행이 곧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고백하자면 실은 요즘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이 예뻐 보이고, 음원 차트 상위권에 있는 노래가 왠지 명곡처럼 느껴지곤 한다. 취향과 기준이 확고한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이상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무색하게도 유행하는 웬만한 것들이 취향에 닿아 버리고 만다. 이를 깨달을 땐 조금 허무해지기도 한다.

다짐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느 날 버스에서 재생한 플레이리스트였다. 첫 곡은 힙합이었다. 둥둥대는 비트와 날것 그대로의 가사로 이뤄진 랩을 듣자니 리듬을 타기는커녕 기분이 안 좋아졌다. 영어, 비속어,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그 노래를 유행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들었는데, 바랐던 기분 전환은 되지 않고 오히려 불쾌해지다니. 

서둘러 다음 곡을 재생했다. 인디밴드 보컬의 잔잔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귀는 훨씬 편안했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귀로 들려온 음악이 머리까지 닿지 못하고 한숨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각종 커뮤니티와 동영상 플랫폼을 점령하던 인기 절정의 밴드였지만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유행한다고 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게 아닌데, 그걸 몰랐다. 그래서 내 취향을 우선에 둬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했을 당시에는 유행을 최대한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신곡이 아닌 노래를 찾아 들었고, 이미 가진 것들 중 유행에 부합하는 것은 사용하지 않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가 유행으로 점철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애를 썼다. 그러나 금세 피곤해졌다. 유행과 취향을 아예 따로 두자니 구태여 멀리해야 할 것들이 생기고, 끌리지 않아도 시도해 봐야 한다는 강박까지 생겼다.

피로를 덜고자 모든 걸 놓아 버리니 그때부터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유행은 시기에 맞게 즐기고, 취향은 저장하면 되는 문제였다. 모든 게 쉬워졌다. 신메뉴가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시 시도하지 않으면 될 일이고, 인기 많은 가수가 낸 신곡이 마음에 쏙 들었다면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두고두고 들으면 된다. 인기가 사그라든 이후에도 취향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취향이 변한다면 또 무슨 상관인가. 새로운 기준에 맞는 것들을 향유하고 이전의 것들은 추억으로 남기면 된다. 

MBTI(자기보고식 성격유형지표), 퍼스널컬러(사람의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색상을 찾는 미용이론) 등 개인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분류하는 이론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후부터 취향과 유행에 대한 민감도가 올라간 듯하다. 다양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나만의 것도 갖춰야 하고, 또 유행에도 밝아야 하는 현대 사회인들은 어쩌면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피로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회는 발빠르게 쫓아가는 이는 줏대 없는 사람, 내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 시선부터 바꿔 보는 게 좋겠다. 전자는 트렌디하고 수용적인 사람으로, 후자는 강단 있고 견고한 사람으로 말이다. 

마음가짐을 고치니 모든 것을 한층 여유롭게 즐기게 됐다. 유행하는 것에 후회 없이 열광하고, 취향에 맞는 것은 꾸준히 고수하면서 두 가지를 모두 누리게 된 셈이다.

그동안 ‘인생 숙제’, ‘적령기’, ‘인간다움’ 등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여러 번 다뤘다. 가치관, 지향점, 목표처럼 어딘가 원대해 보이고 끊임없이 고찰해야 할 듯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이에 비해 취향은 아주 작아 보이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의 첫걸음이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 돼 유행에도, 취향에도 적절하게 걸맞은 사람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천편일률적인 회색이 되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회색 또한 잿빛, 은색, 쥐색, 차콜 등 명도와 채도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개성을 죽이지 않고 유연해질 수 있다. 모든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내보내자. 이러한 태도는 특히 격변하는 개인화 시대를 정통으로 맞이하는 청춘들, 즉 내게 가장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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