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2천40여 년의 오랜 인천 역사 속에 남겨진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 특히 여성과 관련된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것도 ‘인천 여성사(史)’를 정립해 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 뜻에서 지면을 통해 몇 차례 연속으로 인천의 여성문화유산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재 인천 역사에 남은 기록과 터 등을 포함한 여성인물 관련 문화유산은 대략 34점으로 파악된다. 이들 중 지정된 문화유산은 8점, 비지정문화유산은 26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인천시 각 구(區)의 연원적 공통분모를 찾아 ‘문학산권’, ‘개항장권’, ‘계양산권’, ‘강화·옹진권’ 4개 권역(圈域)으로 구분하고 정리해 보면 과거 인천 여성의 삶의 자취와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문학산권’은 전근대 인천 역사의 출발지인 미추홀구와 여기서 분구(分區)됐던 연수구, 남동구를 하나의 권역으로 살펴볼 수 있다. 여성인물과 관련된 대표적 문화유산으로는 인천도호부, 이윤생·강씨정려, 고려시대 인주이씨 왕비들의 본향인 원인재,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 최선화의 육아일기, 지금은 사라진 옛 전도관 자리에서 계명학원을 운영했던 이순희를 꼽을 수 있다.

문학산 일대는 전근대 인천의 읍치(邑治) 공간으로, 그 중심인 인천도호부관아 일부가 문학초등학교 안에 남았다. 조선 세조 5년(1459) 인천군에서 인천도호부로 지방체제가 재편되는 배경에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있다. 정희왕후(1418~1483)는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파평윤씨 윤번의 딸이며, 어머니는 참찬의정부사, 예문관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인주이씨 이문화의 딸이었다. 따라서 인천은 왕후의 외가가 된다. 1428년(세종 10)에 가례를 올리고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졌다.

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의 거사(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 거사에 나아가게 할 정도로 결단력이 있는 여성이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됐고,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했다(1457). 이를 계기로 자성왕비의 외향인 인천군이 ‘인천도호부’로 읍호(邑號)가 승격됐다.

정희왕후는 세조와 사이에서 덕종·예종·의숙공주 2남 1녀를 낳았다. 예종이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했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켰다. 성종 또한 13세의 어린 나이에 등극했기에 정희왕후가 7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66세(1483)에 별세했는데, 생전에 ‘나는 나라에 공(功)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후장(厚葬)하지 말라’ 하며 염습 도구를 모두 면포(綿布)로 만들어 놓아 비단처럼 화려한 물건은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諡號)를 정희왕후(貞熹王后)라 하고 광릉에 안장(安葬)했다.

이윤생·강씨정려는 전근대시기 여성들의 사회적 인식과 가치관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윤생은 부평이씨 후손으로 시조 삼중대광 삼한벽사공신 이희목(李希穆)의 19세 손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윤생은 의병을 모집하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이르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원도(猿島)에 들어가 청군(淸軍)에 저항했고, 분전하다 의병들과 더불어 최후를 맞았다.

전사 소식을 접한 부인 강씨는 바다에 몸을 던져 남편과 함께 의절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강씨에게 정려(旌閭)를 내렸지만, 이윤생은 120여 년이 지난 철종 12년(1861)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좌승지에, 부인 강씨는 숙부인에 추증됐다.

정려각에는 ‘충신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 이윤생지려 철종신유 월 일 명정, 열부증숙부인 금천강씨지려 철종신유 월 일 명정(忠臣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 李允生之閭 哲宗辛酉 月 日 命旌 烈婦贈淑夫人 衿川姜氏之閣 哲宗辛酉 月 日 命旌)’이라는 정려문 편액이 걸려 있다.

전근대사회에서 강조됐던 충(忠), 효(孝), 열(烈)과 관련된 인천시 지정문화유산 중 부부의 정려(旌閭)가 함께 남은 사례로는 이윤생·강씨정려각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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