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정몽주는 고려의 학문을 이끌었다. 고려가 문헌의 나라로 불리게 된 것도 정몽주에 의해서였다. 학자들이 유학자 계통을 저술할 때 당당하게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고려의 정몽주이기도 했다. 성리학의 창시자 정몽주가 죽자 고려도 멸망했다.

1337년 12월 경상도 영천군 동우항리에서 출생한 정몽주의 어릴 때 이름은 몽란이었다. 모친이 잉태했을 때 꿈에 난초분을 품었다고 해서 몽란으로 불렀다. 어깨 부분에 북두칠성을 닮은 7개의 점이 있다고 했다. 9세 때 모친의 꿈에 흑룡이 배나무에 오르는 꿈을 꿔 몽룡이라 했다. 

관직에 오른 후 몽주라 했다. 21세에 소과에 급제하고 24세에 대과에 최우수 성적으로 급제했다. 26세에 예문에 오른다. 31세에 예조정랑겸 성균관 박사로 임명된다. 「주자집주」, 「사서통」 등 유교 관련 서적들을 보급했다.

이색은 동방이학지조, 몽주논리, 무비당리, 횡설견설 등 정몽주에 대한 글들을 많이 썼다. 중국 명나라의 기대천 등 대학자들도 정몽주를 존경했다. 권근·권우·이재오·이양명·변계량은 정몽주의 학문을 따르는 쟁쟁한 유학자들이며 문하생들이다. 

정몽주는 외교·군사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북방지역 경계에 집중하던 고려는 한방신과 정몽주를 함남 화주지역으로 파견, 여진족 축출에 나서기도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왜구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군사 전통문을 받고 이성계와 같이 내려가 전라도 운봉지역에서 왜구들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외교사절로 정몽주는 중국 명나라 남경과 요동을 다녀왔다. 명나라 태조를 만나 고려 자제들이 유학을 할 수 있는 편리와 문화 교류 등을 교섭하기 위해서다. 1377년 9월부터 1378년 7월까지 일본에 머물며 외교활동도 했다. 고려와 일본의 현안을 해결하고 유학자들과의 교류 목적도 있었다. 제98대 관세에 일왕을 만났다.

고려의 정치·외교·군사·학문 분야에서 일하던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기도 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세가 쾌유되기를 기원하는 연회에 참석하고 두문동 집으로 가던 중 대묘리 선죽교에서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124년이 지난 1517년 조선 중종 임금에게서 영의정과 문충공 시호를 받는다. 문묘에서 49번째로 배향 받는다. 정몽주의 묘는 황해도 해풍군에 있다가 1406년 3월 경기도 용인군 쇄포촌 마을 야산에 매장된다. 정몽주가 죽은 직후 아들 정종성 등 후손과 친족 모두가 개성을 떠나 인천 동춘리로 이주해 정착한 것이 올해로 685년이 됐다. 

지난 7일자 기호일보 사회면에 정몽주 후손 묘역이 지역 재개발 아파트 주민들이 인천시를 상대로 하는 법률 다툼에 휩싸였다는 보도를 보고 놀라웠다.

우리는 조상의 산소와 유골 등을 존중해 왔다. 유골 안치소와 산소를 찾아 조상에 대한 예를 표한다. 정성 들여 모시는 조상의 산소가 송사에 휩싸이는 것은 불효로 여겼다.

고려에서는 문무백관 등 공무원들에게 급료로 토지를 주기도 했다. 야산과 전답을 맞교환해 묘역으로 조성하는 일이 많았다. 묘지가 우후죽순 늘어나자 고려 왕궁 만월대와 송악산 부근 유명 유적지에 매장을 감시하는 군사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토지에 몰래 매장하는 사람, 묘역에 밭을 일구는 사람, 관공서에 신고하지 않고 이장하는 사람, 묘를 손상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태형을 받았다. 

고려의 제도를 이은 조선에서도 관사 경계, 능원 묘 경계, 태실 경계, 봉산 경계, 선현 묘역 경계, 사당 경계, 분묘 경계, 주택 50보 경계 내에 묘를 조성하면 형벌이 있었다. 

고려의 충신이며 주석이었던 정몽주의 후손 묘역은 2019년이 돼서야 시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 왔다. 역사적 문헌과 엄격한 심사를 거쳐 문화재로 지정된 묘역이다. 동춘동은 정몽주 후손과 친족들 집성촌이었다. 정착 시기부터 유학자 집안이라 유교적으로 묘역을 조성해 왔을 테다. 훌륭한 분의 후손들 묘역이 인천에 있다는 사실에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정몽주 후손 묘역이 불법 묘역이라는 주장은 어떠한 근거로 나왔지는 묻고 싶고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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