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이나 행동을 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입조심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한다.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며 기분 나쁘지 않게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기준이 윤리, 도덕이다. 인생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무례한 언행을 하게 되면 주변의 질타를 받고, 법 이하의 행동을 하면 처벌받는다. 그러나 법만 잘 지킨다고 덕이 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동양에서는 수양(修養)을 강조했다.

서구의 근대 역사는 덕이 큰 사람이건 아니건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시민들은 힘 있는 자나 가진 자에게서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굵직한 사건을 남겼다. 그 결과 역사의 주도권이 시민으로 옮겨졌다. 사상가들도 자연법사상과 사회계약론을 바탕으로 시민에게 자유와 평등이 있음을 밝혔다.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자유에 대한 사유를 남겨 놓았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로부터의 자유’와 ‘~를 할 수 있는 자유’, 즉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으로 대별했다. 소극적 자유는 개인이 외부로부터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적극적 자유는 자기 지배(self-mastery)를 의미한다. 술과 마약, 게임에 중독된 자가 중독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려면 자기의 자유를 잠시 제한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술과 마약, 게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희생해야 중독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 자유는 자기 절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외부에서 ‘자유의 가면을 쓴 잔혹한 압제’가 들어설 수도 있다. 나치와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가 혼란을 틈타 개인을 지배할 수 있기에 벌린은 적극적 자유를 경계했다.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확대재생산되는 사회에서 자칫하면 질서와 화합이 깨질 수 있기에 공동체주의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늘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공동체는 전체주의, 사회주의, 독재, 파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유교사상, 불교의 상호의존적 연기설(緣起說) 같은 화합을 중시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유교사상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불교의 연기설은 더 나아가 모든 것이 다 연결돼 세계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하나가 그대로 전부이며, 전부가 그대로 하나)’이라고 설명한다. 화엄사상(華嚴思想)의 근본도 만물이 중중무진(重重無盡: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작용하면서 어우러진 현상)함을 밝힌 것이다. 

높은 인품을 유지하기 위해 도덕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근본사상이었다. 예(禮)를 모르면 짐승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개인의 품성이 좌우된다.

차범근 축구교실 대표는 엊그제 이강인 선수의 부모와 자신은 이강인 선수에게 좋은 인성을 심어 주지 못해 사회의 회초리를 맞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강인 선수가 손흥민 선수에게 대들었다는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덕목 중 후자를 함양시켜 주지 못했다는 자아힐책이다. 축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개인의 삶 속에서 자유와 공동체의 화합을 포함하면서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자아성찰이라는 내면의 회초리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개인은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지만, ‘독고다이’처럼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독재와 파쇼를 경계하면서도 ‘나는 광야를 달리는 한 마리 말이 아니라 광야 전체다’를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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