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분노는 한자어로 화(火)입니다. 화가 날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즐거운 일을 마주할 때는 기분 또한 좋아집니다. ‘즐거움’이라는 감정은 무엇이라도 포용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긍정적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화의 감정은 어떤 것이라도 일언지하에 거부하는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화를 권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구성원들이 양쪽으로 갈려 상대를 비난하며 분노를 표합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짜증과 고성과 폭언과 유언비어가 난무합니다.

이런 태도가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할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화(火)는 대체로 파괴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시바를 파괴의 신으로 여깁니다. 그들이 시바를 칭송할 때는 항상 불을 태우며 의식과 의례를 행합니다. ‘불=파괴’라는 등식이 종교의식에서도 적용되는 겁니다. 다른 것 모두를 없애기 위해 내 몸에 불을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것이 타 버리기 전에 이미 나 자신부터 불타 버리지는 않을까요. 그런데도 우리가 화를 낸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화를 낼 때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너 때문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인생을 바르게 보는 법, 놓아주는 법, 내려놓는 법」(쑤쑤)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미에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박쥐가 있습니다. 몸집은 작지만 큰 몸집의 야생마에게는 위협적이라고 합니다. 야생마의 넓적다리에 들러붙어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놓고 말의 피를 빨아먹곤 하니까요. 말이 아무리 날뛰고 미친 듯이 달려도 박쥐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가 부를 때까지 다 먹고 난 뒤에야 유유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말은 죽습니다.

사실 박쥐가 빨아먹은 피의 양은 아주 미미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도 야생마는 왜 죽는 걸까요? 박쥐 때문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박쥐에 물렸던 야생마는 분노에 떨며 미친 듯이 달리다가 결국 고통 속에 피를 흘리며 죽는다는 겁니다. 쉽게 화를 내고 미친 듯 질주하는 야생마의 성격이 자신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야생마가 죽게 된 이유는 박쥐에게 물려서가 아니라 자신이 물린 것에 대해 스스로 화를 지어냈고, 그것을 추스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 때문에 내가 화를 낸 것처럼 믿지만, 사실은 내 안에서 나 스스로가 화를 지어낸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파괴하는 ‘화’를 냈을 때 상대방은 어떨까요? 「인간관계론」(데일 카네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화가 났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퍼붓고 나면 속이 후련해집니다. 그러나 상대도 그럴까요? 우드로 윌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두 주먹을 쥐고 나에게 대든다면 나도 금방 두 주먹을 움켜쥘 겁니다. 그러나 내게 다가와 ‘우리 앉아서 얘기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은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분노를 권하는 사회’라는 말은 ‘화낼 일이 많다’는 것이고, 그만큼 현실 생활이 힘겹다는 말이며, 그래서 ‘내가 화내는 게 당연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뿐만은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기준과 신념이 너무 완고해서 자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낯선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분노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하나만이 옳다는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믿음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 ‘문제’로 보이고, 그래서 분노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화낼 만한 문제’를 보고도 화를 안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잘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파괴’, 즉 ‘부정적인 에너지’인 화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지적하며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내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그 일을 찾아 묵묵히 행하는 태도가 현명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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