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강태운 인문공동체 책고집 공동대표

뉘른베르크는 독일 바이에른주 제2의 도시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즈넉한 중세도시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다. 옛 형태를 잘 유지한 성과 탑 그리고 중세 교회의 모습에서 여유롭고 고풍스러운 오래된 독일을 만난다. 완구 박람회로 유명한 도시이면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

소설가 김훈은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 느낌이 없으면 한 줄도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훈의 말이 아니어도 김훈에게서는 연필 이미지가 연상된다. 작아진 몽당연필을 모아 뒀다가 독자들에게 나눠 준다는 김훈은 노란색 스테들러 연필을 고집한다. 스테들러사는 독일의 필기구 제조회사다. 1662년 프레드리히 스테들러가 뉘른베르크에서 처음 연필을 생산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이 연필은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 단단하면서도 매우 부드럽다네. 목공용 연필보다 색감도 훨씬 좋지. 재봉사 소녀를 그릴 때 이 연필을 썼는데 석판화 같은 느낌이 정말 만족스러웠어. 부드러운 삼나무에 바깥에는 짙은 녹색이 칠해져 있지"라고 했다. 반 고흐가 극찬한 연필은 파버 카스텔사의 카스텔 9000 연필이다. 세계적인 필기구 회사 파버 카스텔의 과거와 현재가 존재하는 곳 역시 뉘른베르크다.

뉘른베르크는 히틀러가 사랑한 도시이자 나치의 산업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돼 인종차별과 유대인 학살의 법적 근거를 제공한 어두운 역사가 있다. 히틀러의 정치적 배경이라는 이유로 연합군의 폭격이 집중돼 도시 전체가 파괴됐다. 독일 전범의 군사재판이 열린 곳이면서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운 노력으로 도시 최초로 유네스코 인권상을 받았다. 체계적인 복구의 손길 덕분에 제발트 교회, 로렌츠 교회, 프라우엔 교회는 중세 교회의 모습을 보존한다.

눈에 비치는 장면마다 새로웠던 뉘른베르크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를 뒤로하고 내가 마음에 담아 온 것은 바로 예수 얼굴이다. 십자가상에 매달린 예수를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었다. 근육질의 엄중한 표정을 한 둥근 달의 예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초승달 모습이었다. 신앙 유무와 관계없이 그 아픔을 잊으면 안 될 듯싶어 예수 얼굴이 담긴 엽서를 여러 장 샀다. 

성 로렌츠 교회에서는 머리에 가시 박힌 월계관을 쓰고 눈은 반쯤 감은 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만났다. 반쯤 벌린 입으로 마지막 가쁜 숨을 들이마시는 것인지 내뱉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픔의 늪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에 아픔이 없는 곳이 있을까. 이제껏 지켜봤기에 누적된 아픔은 버겁기 그지없다. 앞으로 감당해야 할 아픔의 크기 또한 가늠할 수 없다. 예수는 아픔을 초월한 것이 아니다. 부활을 말하는 얼굴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아픔이 집약됐다.

십자가에 매달려 아픔에 겨워하는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가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자 했다. 굶주리고 아픈 자, 앞 못 보는 자, 문둥병자, 앉은뱅이, 자신을 속인 자, 돌을 치켜든 남성들에 둘러싸인 죄 많은 여인이 받던 고통의 합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얼굴이다. 

신자석에 앉아서 정면에 세워진 십자가상을 바라본다. 그 순간 텅 빈 교회는 아픔의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그 아픔을 회피할 수 없다. 예수는 자기의 아픔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아픔을 바라보라고 한다. 안으로는 일상에서 벌인 추한 행동과 지은 죄로 인해 아파하는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밖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데도 결국 감당해 내야 하는 약자의 아픔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필요한 자리는 신에게 떠넘기고, 인간이 필요없는 자리는 탐욕으로 가득하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예수가 짊어진 고통 앞에 우리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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