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인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요즘 들어 점점 한적한 것을 찾게 되는 까닭은 전깃불도, 차도 없는 섬 구석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많이 그리워해서다. 물론 온종일 적막 속에 지낸 건 아니어서 철마다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 빗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와 먼 파도 소리를 섞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조용함 그 자체였다.

이 나이가 되니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적막함과 고요함에 대한 희구로 연결됐음을 알겠다. 그리고 그 시절이 태어나기 전 무명(無明)이었던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한 가장 맑은 시절이었다는 것도 알겠다.

글 쓰는 선비나 은둔처사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나무가 대나무다. 대나무가 사철 푸른 절개나 곧음을 연상케 하는 나무라서 이기보다 바로 속이 비었기 때문은 아닐까. 대나무를 보며 비어 있다는 것의 진리를 배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왕유(王維)의 ‘죽리관(竹裏館)’이라는 시에는 가야금, 대숲, 달빛이 산다. 가야금은 어쩌면 무현금인지도 모른다. 대숲에서 혼자 퉁기던 가야금을 물리면 그 누구도 주인공이 있는 곳을 모르지만 달빛과 서로 조우한다는 아름다운 시다. 한적함의 조건이 잘 녹아 있다. 세파에 시달려 힘이 들 때나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을 때 마음의 죽리관을 지어 놓고 잠시 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적함은 ‘겨를’이다. 현실과 피안을 이어 주는 위안의 다리다. 나를 찾아가는 견성(見性)의 길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나와 마주하는 곳이다. 따라서 거기에 들어가려면 오롯이 비어 있는 혼자여야 한다. 그 겨를에서 무엇을 깨우쳐야 한다면 바로 자연이 주는 무정(無情)이다.

자연은 누구의 권력이 하늘을 찌른다고 해서 그 법칙에 예외를 두지 않고, 재산을 모으느라 평생을 바친 자나 남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은 자나 가난에 찌들어 배 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인 자에게나 공평하게 대우한다.

무정(無情)의 정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자애로운 정이며 가장 깊은 정이다. 따라서 자연은 누구의 원망도 받지 않고 그러므로 오래도록 천하를 지배해도 누가 반기를 들지 않는다. 한적함과 고향을 연관하는 이유는 고향은 자연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기서 들은 소리는 세속에 때 묻은 소음이 아닌 자연의 무정한 소리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한적함을 꿈꾸는 것은 영원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다. 스스로 부대끼거나 밖의 소란에 마음이 상한다면 기차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까 훈련하는 것이다. 반드시 그 기차에 올라타야 하는 운명과의 약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다시 영원한 무(無)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삶도, 이별도 결국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것이라는 이치를 인정하는 공간이 바로 한적함이다. 한적함에 들어 고요히 있으면 자연이 찾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자신이 가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누구라도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을 살면서 스님이나 성직자처럼 거꾸로 사는 삶이 아니라면 빨리 출세의 꼭대기에 올라가 많은 사람을 지휘하고 권세를 누리고 싶어 하는 욕망을 꿈꾼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가서 혼자가 되는 한적한 공간에 들어가면 지금 누구와 무엇을 상대로 권세를 누리려야 하는지 알 수 없고, 권세가 통하지 않는 시간은 어찌 보내는 것이 옳은지도 알 수 없으니 밖에서나 한적함에서나 출세나 명리에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작나무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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