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주 변호사
박노주 변호사

양심은 신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 놓은 선의 뿌리다. 끊임없이 실천의 물을 주며 가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차 고사한다.

자본주의가 비정상적으로 진행되면 양심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기도 한다. 상당히 헐값으로. 인간에게서 양심을 빼면 가치가 얼마나 될까. 요즈음 양심을 팔아버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사람들은 모두 양심을 가졌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동일하지는 않다. 어떠한 사람은 양심에 따라 하는 행위가 부도덕하거나 심지어 범죄행위인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비난만 해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 양심이 병든 것이다. 양심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평화나 대인관계를 위한 첫걸음이다. 도덕적 기준이 높은 사람은 자책을 많이 한다. 그러한 잣대를 타인에게 적용하면 평화로울 수 없다. 사람들 각자는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신에게서 하나씩 부여받는다. 잣대의 길고 짧음은 자랑이나 수치가 될 수 없다. 잣대는 신의 선물이지 사람들 각자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어진 잣대에 따라 살아가기만 해도 이 사회는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인생의 목적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갈 뿐이다. 종교는 양심의 정화나 수정에 도움이 된다. 종교의 진실 여부는 밝힐 수 없지만, 최소한 도덕적으로는 순기능 역할을 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에 있어서 도덕은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실천은 어렵다. 따라서 도덕을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위선적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선적 행동이 사회를 조금이나마 도덕적이게 한다. 나이가 들면서 양심의 눈까지 침침해지는 것인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양심에 반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합당한가. 그러한 변명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양심은 옳은 길로 가게 하려는 신의 은총이다. 그렇다면 양심이 무딘 자는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인가. 양심이 무딘 자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도 신이 창조했고, 그러한 자 자신이 무딘 양심을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 어떠한 행위도 그의 양심에 반하지 않는 한 도덕적·종교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 이상의 행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은 신의 선물이자 행동지침이다.

인간에게는 내심의 소리가 있다. 선한 소리, 악한 소리, 아름다운 소리, 추한 소리가 있다. 이러한 소리는 혼합돼 들려온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다. 이러한 소리의 근원은 이성과는 다른 영역이라 생각한다. 가능하면 선한 소리와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일 일이다.

이러한 소리는 감성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감성은 원초적이다. 이는 태초부터 생존을 위해 서서히 형성됐다. 이성의 형성은 연원이 짧다. 특히 생존 문제에 있어서는 내심의 소리의 영향이 지대하다. 이러한 내심의 소리는 인간의 탄생과 생존의 전제조건인지도 모른다. 신의 계명인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아직 천국이나 지옥이 현세의 행동을 좌우하는 요인은 되지 못한다. 양심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양심은 어두운 인생길을 인도하는 등불이다.

양심에 따른 행동에 관해 신의 평가는 공정하거나 최소한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나의 언행이 양심에 미치지 못함을 자주 느낀다. 따라서 신에게서 최상의 평가는 받지 못할 듯싶다.

양심에 비춰 언행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양심은 신이 부여한 것이므로 신에게도 떳떳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부여받은 양심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보다는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자존심의 근원이다.

양심은 정상적인 인간의 전제조건이다. 무뎌진 양심을 복원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로봇에 양심을 심는 일처럼.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가슴과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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