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KG에듀원 교수
김준기 KG에듀원 교수

불교 최초의 팔리어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중생들에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일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1990년대 여성들이 직면했던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폭로하고 사회적 제약을 고발하며, 등장 인물들에게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제안했던 공지영의 페미니즘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연꽃과 진흙은 그 효용과 의미가 다른 듯 보이지만, 기피와 성가심의 대상인 진흙을 통하지 않고는 정갈하고 아름다운 연꽃은 필 수 없다. 진흙은 불쾌하고 불결한 존재 같지만 연꽃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탄생의 근원이자 생명 유지의 원동력이다.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고 꽃을 피우는 과정은 인간이 번민에 굴복하지 않고 번뇌에 굴종하지 않는 삶을 유지하는 경로와 다름없다. 연꽃의 완성은 진흙이라는 장애물을 통해 무난하게 구현되며, 인격의 성장은 고뇌라는 방해물을 토대로 온전하게 성취된다.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이유는 용맹해서가 아니고,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까닭은 바람이 순해서가 아니며,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사정은 연꽃이 결백해서가 아니다. 그건 사자와 소리가, 바람과 그물이, 진흙과 연꽃이 한몸이기 때문이다. 진흙과 연꽃에 부여하는 각각의 가치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 편견이 저지르는 착각이고, 자의적인 분별심이 일으키는 오해에 불과하다. 유용한 가구나 질그릇은 무용한 통나무나 흙에서 비롯됐듯이 진흙 없이 연꽃은 개화할 수 없다. 망념 없이 깨달음이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단점을 자각하고 사나운 난관 속에서도 스스로의 인품을 유지하며 모진 세파 속에서도 늘 자기의 자존을 지켜 나가는 놀라움을 발휘한다. 나아가 더 진중한 각성을 통해 성숙한 안목을 형성하고 뜻깊은 희생을 감내하며 어려운 주변을 배려한다. 또 본인을 에워싼 각양의 적과 화해하고 한계를 극복해 급기야 투명한 양심과 깊은 존엄을 회복하는 기적을 연출해 내기도 하는데, 그 결기와 열정은 바로 고통에서 연유한다.

조선 선조조 서인의 뿌리이자 이이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익필은 자신의 시 ‘객중(客中)’에서 ‘시련 속에서 사물의 이치가 분명해지고 적막 속에서 마음의 근원 드러난다네(艱危明物理 寂寞見心源)’라고 시련과 적막의 효용성을 노래했다. 사나운 간난(艱難)의 시간을 겪고 나야 비로소 세상의 사리가 선명하게 인식되고 인간의 도리가 명확하게 자각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시련은 적막의 과정을 겪으며 성찰을 통해 구체적이고 선명한 마음의 길을 연다. 따라서 시련과 적막의 어울림은 당장은 고독하고 힘겹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삶을 보람과 성숙으로 이끈다.

농부들에게는 살을 에는 추위가 차가운 은총이요, 냉정한 자비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감각적 경험이다. 만일 매서운 겨울이 없다면 생존을 위한 동물들의 동면은 불가하며, 수확을 도모하는 이들의 고된 땀은 쉴 순간을 상실한다. 악마가 내쉬는 숨소리처럼 들리는 섬뜩한 삭풍이야말로 잠시지만 일꾼들에게 중노동을 면해 주고 휴식을 제공하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마치 밤이 없다면 그 과중한 노동에서 쉴 수 없듯이, 역경 없이 인간은 끝없이 타오르는 맹렬한 욕망으로부터 잠시도 비켜서기 어렵다.

마음이 당하는 괴로움은 여간해서는 일회적인 가벼운 인내로 온전히 극복되지 않으며, 정신이 겪는 환난은 웬만해서는 일시적인 달콤한 위로로 충분히 회복되지 않는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무기력한 자책과 대안 없는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 또 분노와 원망을 견제하며 핑계와 남 탓을 배제하고 솔직하고 냉철한 자기 성찰의 순간과 무겁고 진지한 인내의 시간을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난관 극복의 올바른 방향과 근본적인 방법이 모색될 수 있다. 

나무의 뿌리는 상처를 이겨 낸 진통의 흔적을 그대로 담았다. 하지만 뿌리의 상처는 나무의 몸통을 건강하게 키우고 지탱하는 토대이자 시련과 맞서는 힘이다. 삶은 깊은 고난과 함께 한층 더 강건해지고 아픈 상처와 함께 더욱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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