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를 앞에 두고 생각에 빠진다. 무얼 쓰려고, 무얼 그리려고, 무얼 만들려고 종이를 펼쳤을까 하고.

인간은 태어나면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한다. 뭐 여러 학설이 있겠지만, 대부분이 기억조차 못하는 탄생 순간의 정신적 상태를 놓고 왈가불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쨌든 하얀 인간은 성장기를 거치며 다양한 색을 묻히고 변해 간다. 맑고 아름답기만 한 세상이면 좋으련만, 온갖 더러움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하얀색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어쩌면 가족이, 어쩌면 아끼는 사람이, 어쩌면 생면부지 누군가의 색이 침범해 삶을 흔들어 댄다. 극렬한 고통이나 충격적인 사건은 인간 자체를 물들여 완전히 바꿔 버리기도 한다.

얼마 전 환자복을 입을 일이 있어 입원을 했다. 고마운 간호사분이 채혈하는 과정에서 피가 몇 방울 튀니 환자복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색이 참 곱기도 하다는 생각은커녕 단 한 가지 ‘아프다’는 느낌이 온몸을 지배했다.

수술 후 멍하니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면서도 외친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하고. 핏자국이 생긴 환자복을 삶이라 한다면, 역시 인간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존재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전부다. 굳이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도 없고, 그런 건 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나 하라고 놔두자. 최근 들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이 같은 생각이 강해졌다.

스스로를 속여 가며 삶을 살아갈 때가 많다지만, 감정마저 감추라니 젊은이들이 답답한 것 아닌가. 내가 힘들고 지친다는데, 주변에서 아무리 "미래를 생각해서…"라는 헛소리를 해대도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가족이나 주변에서 강요하는 기대감이 지나치다면 삶을 망칠 수 있음을 어찌 모를까. 해결 방법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기만 하다.

주변에서 도와 줄 건 그저 손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언제나 따뜻하게 존재해 주기만 하면 된다. 조언이나 도움을 받을 상태도 아닌데, 오히려 강요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강해져서 영혼을 다잡는 평상심이 일상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주변에서 온갖 헛소리를 떠들어대도 스스로를 지키면 그만이다. 그 인간들은 그냥 그렇게 살게 두고, 조언을 빙자한 참견은 무시해 버리고, 올곧게 스스로의 삶에 그려 나가면 그만이다.

소중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신밖에 없음을 한번 더 생각하길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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