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는 곳이 바로 인천시 서구 검단지역일 것이다. 2012년 봄, 검단사거리 인근에 터를 잡았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인천시 끝자락에 자리해 교통이 다소 불편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인천도시철도 2호선이 2016년 7월 개통되면서 불편함은 많이 해소됐다. 

인천도시철도 2호선을 타고 검단사거리로 가다 보면 열차가 지상 검암역에서 지하 독정역으로 내려가기 바로 전 눈앞에 한적한 풍경의 ‘한들마을’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줬다. 하지만 몇 년 전 철거가 시작되더니 지금은 아파트촌이 시야를 가로막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자연부락이 사라지고 ‘콘크리트 공화국’이 건설됐다.

"여름에 입주한다는/ 신성한 새집을 올려다보는데/ 그 밑으로 붉은 벽돌담장/ 불두화 하얀 고염주네 있다//

동네 첫 번째 이층양옥 딸고만네 집/ 갱실네 반짝이는 파란 세라믹 기와지붕/ 중풍 맞은 왕표 씨/ 네 살배기 손자놈 오줌발로 샌다는 지붕/ 초록색 천막 덮고 폐타이어 올려놓은 거//

감나무 꼭대기 삭정이보다 높은 사십 층/ 옥상에 올라앉은 쪽달/ 무진장하게 시퍼런 한들벌 눈알 쪼며/ 탈탈 낮을 털고 있는 거/ 다 보인다//

대패질한 듯 한들로/ 이팝나무 가로수 심은 당년에 꽃피고/ 로얄파크 들어가는 좌회전신호가 저녁까지 길다."

심응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좌회전 신호가 저녁까지 길다」(현대시학사, 2023)에 실린 ‘한들아파트 1’이다. 시집 뒷부분 ‘시인의 산문’에서 "마을 뒤쪽에는 둥구재가 있고 앞쪽 계양산 꽃메에서 발원한 시시내가 있어 남향바지 배산임수 터"라고 마을을 자랑하면서, ‘태어나서 한 번도 이사해 보지 못’한 한들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지금도 나는 무언가 빠트리며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시집에 수록된 시들 대부분이 유년시절부터 최근까지 한들마을에서의 경험과 기억들로 채워졌다. 더불어 살아왔던 사람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다양한 음식들이 지난 세월을 웃음 짓게 만든다. "마누라 졸라 밀가루 반죽에 다진 청양고추 넣고 껍질 득득 벗겨 채 썬 청둥호박에 고추장 넣어 들기름에 부친 장떡밤참 먹을 때 숨이 턱에 차도록 매워 얼음 뜬 동치미 국물 심심하게 입가심"(밀장떡)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편, 흠뻑 취해 "집으로 가다 구척이나 되는 놈과 싸웠단다 잡채기 덧걸이 빗장걸이에도 꿈쩍하지 않는 그렇게 쎈 놈 처음이라며 어디 사는 놈이냐고 종주먹을 댔다"는 갓난이이모부, "날 밝아 자전거 찾으러 갈 때 미루나무 아랫도리에 황소 뜸베질한 듯 논둑 패이고 나무뿌리 드러나 있었다"고 해학적으로 소개한다. 이처럼 한들마을에서의 기억과 함께 이들에 대한 애정이 깊게 깔렸다. 

중국의 학자 증대흥은 「문학지리학개론」에서 문학경관에는 첫째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경관이 있고, 둘째 작가가 묘사한 경관이 있으며, 셋째로 문학 독자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경관을 근거로 자신의 지리적 인식과 심미적 연상을 결합해 재창조한 경관이 있다고 한다. 

자연경관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 변화했다. 그리고 한번 변한 자연환경은 본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문학작품 속에서나마 그 모습이 오롯이 남았다는 것이 지난날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다행일 테다. 진해수 평론가의 시집 후기를 대신해 글을 맺는다. 심응식 시인이 비 멎기를 기다리며 한들마을 고층 아파트 사이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도 그 ‘빈자리’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다. 겨울밤 주전부리로 사랑방에서 웃고 성내던 사람들은 새로 난 길과 건물들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시절(時節)을 잃는다는 것이 시인에게는 ‘지워질 것들’의 무게로 묵직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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