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민 성균관대 겸임교수
정종민 성균관대 겸임교수

바보는 지능이 낮아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라는 뜻과는 다르게 늘 웃는 긍정의 에너지를 가진 꾸밈없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너무 좋아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 중 자신을 스스로 바보라고 칭한 사람도 있으며, 얼핏 바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위대한 삶을 살다 간 사람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자신을 바보라고 했다. "태어날 땐 당신만 울고 모든 사람이 웃었다. 이 세상을 떠날 땐 정반대로 당신은 웃고 모든 사람이 우는 인생을 살아라"라고 말한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40만 명의 자발적 추모 인파가 모인 ‘명동의 기적’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의 정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인간애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라 품어 주고 안아 주고 말을 들어 주는 섬김의 리더십이다. 그런 지도자, 그런 큰어른이 없으니 추기경이 더 그리워진다"고 했다. 타의에 의해 나라의 큰어른으로 추앙되고, 스스로 바보를 자청했던 추기경의 웃음은 온 국민의 가슴속에 남았다.

법정은 바보 스님이었다. 그는 본래 ‘천화(天花)’를 하고 싶어 했다. 천화란 고승이 임종을 앞두고 홀로 깊은 산속으로 걸어가다가 힘이 없어 쓰러질 때 주변의 나뭇잎을 주워 모아 자신을 덮어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즉, 깊은 산속에서 아무도 몰래 남에게 부담 주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법정 스님의 유언은 "내가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수의도 입히지 말고 다비식도 열지 말고 비석도, 무덤도 만들지 마라. 내가 쓴 책은 다 절판하고,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마라. 그리고 타고 남은 뼈와 재도 오솔길에 뿌려 주거라"였다. 스님은 아무것도 남김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유훈은 영원하다. 스님은 참으로 맑고 향기로운 불멸의 바보였다.

장기려 박사 댁에 머물던 제자가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박사께 세배를 드렸다. 세배받은 박사는 덕담으로 "금년에는 날 좀 닮아서 살아 봐"라고 말했다. 제자는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모르는 척하며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라고 응수했다. 박사는 바보처럼 껄껄 웃었다.

애플의 정신적 지주였던 스티브 잡스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Stay hungry, Stay foolish(늘 배고픈 듯, 바보인 듯 끊임없이 추구하라)"라고 말했다. 인류의 삶을 뒤바꾼 미디어, 스마트폰은 이 말을 앞장서 실천한 잡스 덕분에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우직하게 살았다.

바보는 대부분 거짓말을 하지 못해 상황에 따라 둘러대지를 못한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우직해 이리저리 휩쓸리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한결같다. 바보는 내 것을 내어 주거나 빼앗긴다. 남의 약삭빠른 재주를 보면 눈 돌린다. 남의 실수는 알아채지 못하거나 눈감아 준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곤 한다.

현대인들은 참으로 영리하고 똑똑하다. 너무나 똑똑해 조금도 손해 볼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바보처럼 살아가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바보 소리 들으며 산 인생은 성공한 삶이라는 역설도 가능하다. 스마트한 이들에겐 두뇌와 계획이 있지만, 바보들에겐 뚝심과 이야기가 있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살 만한 이유는 그 누구보다 바보스럽게 원칙을 지키며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바보의 뜻은 ‘바다의 보배’, ‘바라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의 줄임말도 될 수 있다. 바보처럼 살다 간 분들과 바보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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