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위에서 차갑기만 해라.-허경진 역' 빼어난 문재가 불행의 굴레가 되어 예술혼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조선 중기 비운의 여류문인 허난설헌(1563~1589·본명 초희).
 
그녀는 스물세살때 꿈에서 본 경치를 묘사한 이 `몽유기'를 지었고 4년뒤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됐다(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불교식 화장)에 부치라'는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으나 다행히 친정에 남겼던 시고의 일부가 동생 허균을 통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난설헌은 뛰어난 문인으로 재조명될 수 있었다.
 
평소 친교를 맺고 있던 허균에게서 난설헌의 유고시를 전해받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1606년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을 발간, 이 시집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로부터 80여년이 지난 1692년 부산 동래에서 다시 출간된 `난설헌집'은 일본에도 전해져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난설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한양에서 살았다.
 
고려 때부터 대대로 문장가와 벼슬아치를 길러낸 명문가인 양천 허씨 집안에서 난 것이 타고난 예술혼을 지닌 그녀에게는 오히려 불행이었다.
 
남성중심의 봉건사회에서 정식으로 학문을 배우지 못했지만 8세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시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재능은 조선시대를 살아야 하는 여성에게는 평탄한 삶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그는 15세에 역시 명문가인 안동 김씨 집안에 시집가면서 빼어난 문재를 부담스럽게 여긴 남편 김성립에 의해 곱게 간직해온 분홍빛 꿈이 조금씩 깨진다.
 
김성립은 부인에게 열등감을 갖고 과거공부를 핑계로 밖으로만 나돌았고 시어머니는 집안일보다는 책읽기를 더 좋아했던 며느리에게 삼종지도만을 강요했다.
 
고단한 시집살이 속에서 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승에서 김성립과 이별하고/ 지하에서 두목지를 따르리(人間顧別金誠立/地下長隨杜牧之·두목지는 자유분방한 시를 구사한 당나라 시인)'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그녀 나이 18세에 객사하고 두해 뒤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갑산으로 유배돼 5년만에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딸과 아들까지 차례로 잃은 난설헌은 몰락해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슬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의 억압에서 오는 고통을 선계를 동경하는 창작으로 승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시 213수 가운데 128수가 속세를 떠나고픈 심정을 읊은 신선시라는 점이 이를 추측케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내방가사 중 최고로 인정되는 난설헌의 `규원가'는 독수공방하며 지내는 부녀자의 고독한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자신이 겪어야했던 외로움과 한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요절한 조선의 천재문인 난설헌의 무덤은 광주시 초월면 경수산 안동김씨 선영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가 전사한 남편 김성립과 그의 두번째 부인 홍씨의 합장묘 아래 따로 묻힌 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돼 있다.

용인군 내사면과 원삼면 사이 맹골마을의 양천 허씨 문중 묘역에는 1914년 세워진 난설헌 허초희의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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