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 취급소와 TV 홈쇼핑, 고양이…
   

이 여자, 정혜(김지수)의 일상은 까닭없이 평화롭다. 직장인 우편물 취급소에서의 단조로운 일과와 TV 홈쇼핑으로 사들인 물건들로 채워진 작은 집, 아파트 화단에서 주워 온 어린 고양이. 이것들은 그녀만의 작은 세상을 구성하는 몇 안되는  것들이다.
   

각박하고 폭력적인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조용한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사실 지금의 세상과의 소통을 막는 과거의 아픈 상처가 있다.
   

부산과 선댄스, 베를린 등 영화제를 통해 먼저 호평을 받아온 `여자,정혜'가  3월10일부터 봄날 극장가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영화는 여성의 내면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여주인공 김지수의 열연, 사랑과  상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등으로 이들 영화제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배우 김지수의 발견' 혹은 '2004년 한국 영화의 발견'이라는 호평을 들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흔히들  하는  얘기지만,사실 의심스러운 말이다. 아픔을 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듯한 소란스러운  세상, 이 속에서 사랑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히려 또 다른 부담일 수 있다.
   

과연, 영화가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무표정 속에서 속시원한 결론을 보여주고는 있지 않지만 영화는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묘한 매력을 담고 있다. 평범한 듯 보이는 여자와 그녀의 가슴 속에 묻혀 있는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내던 이 영화는 희망의 희미한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정혜에게도 사랑이란 보이지 않을 듯 희미해 보이는 가능성 같은 것이다.  어린시절의 아픈 기억들과 엄마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녀. 사람들은  그녀가 불행할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사실 과거는 고통이라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 혹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가능성을 막고 서 있는 어떤 것들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남자(황정민)가 그녀의 일상에 끼어든다. 작가 지망생인 그는 자신의 원고를 부치기 위해 정혜의 우체국을 찾는다. 정혜는 그에게 묘한 설렘을 느끼고 용기를 내서 말한다. "저희 집에 오실래요?"
   

언뜻 보기에 단조롭고 평범해 보이지만 영화는 우리 일상 속에 공존하는 불안과 폭력, 그리고 행복과 희망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자극적인 영화보다도 더 진한 울림을 준다. 특히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과거의 슬픔과 고통이 분출되는 후반부는 극장 문을 나서고 나서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다.
   

공감 속에 강한 울림을 주는 것은 주인공 정혜를 연기하는 여배우 김지수의  힘과 100% '들고찍기'로 촬영해 순간 순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  내는  카메라의 덕이 크다. 특히 그동안 TV 드라마에서 개성을 드러내지 못했던 김지수라는  배우를 이번 영화를 통해 새로 보게 되는 것은 관객으로서도 큰 기쁨이다.
   

단편 '우리 시대의 사랑'을 만들었으며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던 이윤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나쁜 남자' 등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과 `주홍글씨'(변혁) 등을 만든 LJ필름이 제작을 맡았다.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98분.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