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지난해 10월 어느 날, 낯선 전자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광고나 컴퓨터 바이러스를 경계하는 습관대로 찬찬히 살펴보니 시민단체에서 한번 만나 속 깊은 얘기 나눌 기회도 없이 헤어졌던 분이다. 오랜 서울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유기농법으로 배 농사를 짓겠다며 서울에서 순창으로 귀농한 초보농군은 주문한 배를 추석 전에 도저히 보낼 수 없다는 내용을 담았고 통장번호를 일러준다면 선불로 받은 대금을 돌려주겠다며 추신에 달았다.
 

시장에는 큼직큼직한 배가 벌써부터 비싼 값에 거래되고 `유기'라는 벼슬이 붙은 과일은 적지 않은 프리미엄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칙을 지키려는 초보농군은 일반 배와 같은 값을 제시했다. 여유 있는 계층만 좋은 배를 골라 먹는 불합리를 거부한 것이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관행농업의 과수원을 인수하고 유기농법으로 힘겹게 노력한 결과 평년의 10%만을 건질 것으로 예상하는 그는 낙담하는 기색 없이 기존 유통망을 거부하고 소비자와 직접 만나려 했던 것인데, 그만 출하시기를 일찍 잡은 것이다.
 

시장에 나온 큼직한 배는 지베를린이라는 식물성장호르몬이 처리된 것이라 한다. 배나무도 생명체다. 따라서, 대지와 자신의 건강 상태와 계절에 맞는 호르몬을 적기에 적량 분비한다. 그런데, 인간이 억지 투입한 성장호르몬은 모든 걸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줄기는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는데 잎은 과도한 탄소동화작용을 강요당하고 뿌리는 과다한 영양분을 빨아들여 혹사당한다. 가는 가지에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과 달리 만신창이가 된 어린 나무는 면역이 떨어져 병충해에 시달리지만, 관행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해결하려 든다. 효율이 떨어지면 베어내 새 나무로 교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석이 지난 10월 하순이라야 당도가 충실한 배를 딸 수 있으니 기다려 달라는 초보농부는 미안한 마음으로 할인까지 제안했지만 메일을 받은 이 대부분 환불은 커녕 할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전 유혹을 마다하고 자연의 순리를 고집하는 농군다운 원칙에 감사하고 오히려 배를 추가 주문하기 시작했고, 소비자의 믿음에 크게 감동한 초보농군은 더욱 강해진 긍지로 유기농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여전히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지만, 유기농업으로 땅과 나무가 살고 소비자가 산다면 머지않아 생산자도 살아남을 거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들보다 빨리 많은 돈을 벌려는 욕심으로 어린 나무에 생채기를 내고 그것도 모자라 성장호르몬까지 처방하는 관행농업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질서를 무시할 뿐 아니라 농약과 화학비료로 생명의 터전까지 크게 교란한다. 웃자란 건 농작물만이 아니다. 인간이 투여한 성장호르몬 덕분에 어린 나이에 출산을 마친 젖소는 전보다 많은 우유를 생산하지만 수명은 크게 줄었는데, 우유를 음료수처럼 들이키는 인간도 웃자라기는 마찬가지다. 나이에 관계없이 성인병에 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친구들과 뛰놀지도 못하고 영재교육을 빙자한 선행학습을 강요당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어떤가. 코뚜레에 묶여 배합사료만 먹는 비육우나 지베를린과 화학비료에 찌든 배나무와 무엇이 다른가. 남들보다 일찍 구구단을 외고 한글과 영어를 깨우친들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어디에서 긍지를 찾을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벌어들일지언정 마음 터놓을 이웃 친지 만나기 어렵고 심호흡할만한 자연이 드물어진다면 그게 무슨 보람인가. 선행학습이 만연된 세상에 자폐아가 많은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인간이야 돈과 약으로 수명연장을 잠깐 꾀할 수 있겠지만 무너지는 자연은 어떤가. 건강한 자연 없이 인간도 건강할 수 없는데.
 

순창의 초보농부는 맨손으로 거름을 나르며 관행농업으로 피폐해진 과수원을 되살리려 무진 애를 쓴다. 그이 덕분에 나와 같은 속물도 숨쉴 공간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도시생활로 비축한 돈이 바닥나기 전에 유기농업이 정착해 애쓴 보람을 찾기를 바라면서, 아직 숨쉴 공간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더 이상 웃자라면 결국 자신의 수명마저 단축되고 말 거라는 사실과 함께.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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