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3번째로 개항했고, 개항일은 1883년 1월1일이라고 일본인 세계사연표에 기록되어 있다. 새해의 첫 날, 일본이 그 날을 인천의 개항일로 설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천개항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으로 나름대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었다.

     

인천 개항일도 일본의 일방통행

일본은 명치유신(1868년) 이후 서양의 양력을 도입·운영해 왔고(우리는 1895년 이후 시행) 인천의 개항일도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서양의 양력에 따라 1883년 1월1일로 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실록'에는 그 날이 인천의 개항일이라는 기록도 없고 그저 평상의 고종 19년(1882) 11월23일 뿐이니, 비록 인천의 개항이 타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개항일마저 일본의 일방통행에 의해 고착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개항 이후, 개항장 모두가 일본인의 주목 대상이 되었지만 수도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천은 더욱 더 주된 표적이 됐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흉내내듯 개항장 곳곳을 마치 고대 로마가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인천 개항 10년을 맞이한 1892년, 청일전쟁(1894년)이 일어나기 바로 전, 일본은 인천의 상황을 자국(일본)에 알리기 위해 `인천사정(仁川事情)'을 발간하고 있다.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인천으로의 이주 안내서와 같은 것으로, 인천에서의 일본인들의 활약상을 전해주는 데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차후 일본인에 의해 쓰여지게 될 식민지 역사서의 선구자격이라 할 수 있다.

1904년의 러·일전쟁은 세계 여러 나라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연승으로 시종했다. 그후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놓고 일본과 흥정한 댓가로 한국 지배를 인정했고, 영국 역시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한국은 이제 그나마 남아있던 독립국가의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이른바 `을사늑약'이라 불리워지는 한일조약(1905년 11월)을 맺고 말았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래, 해아밀사사건(1907년 6월)으로 이준(李儁) 열사는 울분을 터트리며 객지에서 목숨을 잃었고, 고종을 농락해 순종이 황제로 오르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획책됐으며(1907년 7월), 그나마 얼마남지 않은 군대마저 해산시키는 폭거가 자행됐다(1907년 8월). 나아가 우리의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한국내의 분위기 속에서도 인천에서는 일본인이 주축이 된 인천개항 25주년 기념회가 발족됐고, “용감한 일본인들은 (한국내에서)위기가 빈번했지만 박해를 물리치고 (인천을) 실업(實業)의 대도시로 건설하게 됐다” 운운하면서 보라는 듯이 `인천개항 25년사'를 발간하고 있다(1908년 4월). 그때까지 한일합병은 되지 않았지만 그들 일본에게 있어서의 인천은 이미 `우리(일본)의 인천'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우리의 관리들을 회유했고, 얄팍한 통계수치와 외형적 변화만을 앞세워 그것이 마치 발전의 전부인 것처럼 위장하는 솜씨도 탁월했다. 20세기 초 우리에게 `자력 근대화'의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외세에 침탈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유도하고, 그래서 여타의 제국주의보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교활함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역사교육을 강화해야할 필연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천개항 25년사'의 의미 되새겨야

최근 인천시 역사자료관은 `인천개항 25년사'를 번역·역주, 발간했다. 비록 일본인의 시각에서 인천개항을 서술한 것이기는 하지만 개항기 인천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비교·검토할 근거로서의 자료적 의미는 지닌 책들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천 발전의 주체가 인천 거주의 일본인으로 왜곡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실로 역사 왜곡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냉철한 이성과 역사의식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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